캐서린 메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웅진지식하우스, 2022.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웅진지식하우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저자 캐서린 메이와,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삼십대 끝무렵에 이르러서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진단받은 캐서린 메이. 저자의 신작에 대한 홍보문구를 접하고 자연스럽게 서평단을 신청했다. 서평단에 선정되고서는 나도 모르게 신간이 아니라 기존에 구입해 읽다가 완독하지 못했던 전작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를 먼저 완독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어 전작의 남은 부분을 먼저 일독했다.

 전작에서 저자 캐서린은 윈터링’, 겨우나기에 대해 다룬 바 있다. 삶에서 가장 어둡고고도 추운 겨울의 시절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누구에게나 겨울은 있으며 그 겨울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역설한 바 있다.

 

윈터링(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 ― 옮긴이)이란 추운 계절을 살아내는 것이다. 겨울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거부당하거나,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발전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웃사이더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인생의 휴한기이다.

 

-캐서린 메이,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웅진지식하우스, 2021 중에서.

 

행복이 하나의 기술이라면, 슬픔 역시 그렇다.
그것이 바로 윈터링이다.
슬픔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캐서린 메이,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 웅진지식하우스, 2021 중에서.

 

특히 그녀가 우울과 슬픔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겨울을 보내는 방법으로 소개되는 바다수영이 인상적이기도 했는데, 이번 신간인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에서는 그 연장선상으로 걷기가 제시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 사실 바다수영은 겨울의 시간을 잘 보내고 고통을 해소하는 나름의 방법 중 하나였지만 걷기라는 행위는 자신의 고통마저도 전체적인 삶으로 통합하고자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저자의 자기고백은, 라디오를 듣다가 자신의 자폐 증상을 인지하는 순간에서부터 출발한다. ‘스펙트럼 선상에 있나?’라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저자의 내부에 있으나 걷기를 통해 그 답은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온다. 저자가 유년시절부터 겪어온 자신의 고통에 대해 그 누구도 진단해 주지 않아 겪는 답답함이 책에 잘 묘사되는데, (98-104.) 사실 그녀에겐 오히려 그 고통을 이해하고 수용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점에서 서른 아홉에 자신이 자폐 스펙트럼 선상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저자에게 있어서 어쩌면 평생 가져온 자신의 남다름’, ‘이상함에서의 해방이 아니었을까 싶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는 나에게서 좀 예민한 상태이긴 해도 행복하게 잘 지내는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가 이미 구축한 나의 이미지에 반기를 들어봤자 아무 소용 없었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니 나는 그런 단순한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넘겨버리는 듯ᄒᆞᆮ. 넘겨버리는 게 버릇이 되었다. 나는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캐서린 메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웅진지식하우스, 2022, 102.

 

 ‘남다름’, ‘이상함’, ‘기이함’. 자폐스펙트럼장애 뿐 아니라 세상의 기준과 달라 이해받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부과되는 수식어이다. 특히 특정한 진단을 받지 않거나, 자신에 대한 이해 측면에서 무언가 괴리감을 느낄 경우 자아 스스로 더욱 큰 불안과 혼란을 느낄 것이다. 책의 추천사를 쓴 정지음작가(민음사, 젊은 ADHD의 슬픔저자)님도 캐서린 메이와 마찬가지로 성인이 된 후 ADHD 진단을 받았기에 아마 캐서린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싶다.

 

 이 책은 자폐스펙트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위한 책은 결코 아니다. (그런 책을 읽기 원하신다면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를 권하고 싶다.) 그러나 캐서린 메이라는 한 개인이 자신의 자폐 가능성을 발견한 이후 자신의 삶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에세이는 깊은 통찰과 부드러운 사유로 자기치유의 성격을 넘어 하나의 문학작품과 같이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저자는 자폐 스펙트럼 선상에 있지만, 책을 읽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 데 탁월한 역량이 있다.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누군가는 상호작용이나 의사소통에서 부족한 점을 지닐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본인 역시 그러하다. 업무를 보면서도, 일상생활에서도 늘 뚝딱이곤 한다.) 누구나 조금씩 어느정도는 스펙트럼 안에 있는 한 개인으로서, 각각의 한 개인이 누구나 특별하고 가치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스러이 느낀다. 지난 여름 사랑스러운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보았고, 이번 겨울 캐서린 메이의 글을 통해 다시금 보았듯이 진정 중요한 것은 자폐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닌 개개인의 존재 자체라는 것을, 저자의 글을 통해 다시금 체감할 수 있었다.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뇌신경을 가지고 있고 다른 특별함을 지닌 존재일 수밖에.

 

자폐인들을 생각하면 별무리나 은하계가 떠오른다. 수백만 개의 서로 다른 별들이 저마다 빛을 발하며 반짝인다. 나는 그 무수한 별들 가운데 하나의 유형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캐서린 메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웅진지식하우스, 2022, 9.

함께 읽을 책으로 저자의 전작과 함께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젊은 ADHD의 슬픔을 권하고 싶습니다.

 

 

 

 
by papyros 2022. 12. 9. 23:59

김보영·박수정, 『나는 임고생이고 기간제교사입니다』, 저녁달고양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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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네이버 카페 '북카페 책과 콩나무' 서평 이벤트 활동의 일환으로, 저녁달고양이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북카페와 출판사, 그리고 저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북카페 책과 콩나무 : https://cafe.naver.com/booknbeanstalk

 




  책의 제목을 끈 순간, 이것은 내 이야기이고 그래서 더욱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책을 만났다. 어쩌면 이 책을 만난 것은 운명인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로 서평을 시작하고자 한다.

  해당 도서를 알게 된 것은, 서평단 모집 마감일은 지난 513일이었다. 실업급여를 받는 사람으로서 실업급여를 수령하기 위한 구직활동의 일환으로 지원한 학교의 전문상담 기간제교사 자리에 합격해서 면접을 보러간 바 있다.
집에서 아주 멀지는 않은 광주의 모 중학교였는데, 2개월 자리이고, 임용공부를 하기에도 방해는 되지않으리라 생각해 다소간 합격의 마음을 품고 면접자리에 임했다.

  앞선 면접자분이 나오시기를 대기하던 중, 본교무실 선생님들의 안내로 마침 국어선생님 책상에 앉아 대기하게되었는데 바로 그 국어선생님의 교무실 책상에 놓인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오잉 제목부터 나잖아? 내얘기잖아?'는 생각이 스쳤고, 책 중독자라 이건 어떤 책일까 살펴보던 와중, 그 책이 저자사인본이라 더욱 그 책을 소장한 선생님이 부러워 면접을 마치고 나오며 해당 책의 정보를 검색하게 되었다.
  심지어 책과 콩나무카페에서 해당 책을 모집하는 중이었으며 신청 마지막날이었기에 이책과의 만남을 개인적으로 필연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아마 저자분 중 한분인 김보영선생님께서 내가 면접보고온 학교서 근무중이신듯 하다.
학창시절부터 오랫동안 책 중독자로서 다독해왔고 스무살 이후 서평단에 참여해 블로그에 올린 서평들이 이제는 적지 않은 양이라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서평단으로서 책을 무상제공받아 서평을 올리게 된 책들 중 가장 빨리 완독후(책을 반나절만에 일독했다.) 서평을 쓰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분들의 삶이 곧 내 삶이고, 책의 제목이 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과목은 다르지만 나도 두 분 저자분들처럼 중학교 1학년, 열세살의 어린 나이부터 교직을 마음에 품고 자라왔다. 아마 교사라는 꿈은 어쩌면 모범생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품을 수 있는 가장 큰 목표일지도 모르겠다. 내향적이고, 수업시간에 가장 집중해 수업을 듣던 학생이었던 나는 또래친구들보다 선생님들께 인정받고 싶어했고 성실한 학생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피드백을 곧 나를 이루는 가장 주요한 가치로 내면화해왔던 것 같다.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과목이 바로 국어 교과였기에, 국어 교사를 목표로 두고 삶을 살아왔다. 저자분들과 과목과 다를 뿐 오랜 세월 교직을 바라온 그것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책의 첫부분부터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범대에 바로 입학한 두분 저자분들과는 달리, 나는 사범대 입학에 실패했다. 교원자격을 취득하고 몇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한으로 남는 부분인데, 3때는 모 대학 국어국문학과수시전형에 합격했으나 너무나 하향지원한 학교라 결국 등록을 포기하고 재수를 했고, 재수시절 서울의 사범대 국어교육과 두곳에 수시전형 1차에 합격했으나 수능 최저등급을 맞추지 못해 결국 최저등급이 없었던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시작부터 좌절감과 교사가 되어야만 한다는 조급함을 안고 나의 스무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스무살의 나는 그렇게 영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교직이수를 바란다면 쉬운 과목 위주로 수업을 듣고, 교직에 선발된 다음 학점이 조금 안나올지라도 듣고싶었던 과목들을 들으면 되는 일인데 마음만 급하고 영리하지 못했던 나는 어려운 과목을 욕심내어 먼저 들어 결과적으로 교직이수 면접에 올라갔으나 등수에 밀려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3학년 때 준비한 사범대 편입에서는 예비 1번을 받고 최종적으로 불합격 결과를 받았다. 결국 대학원에 진학해 국어 교원자격증을 취득하는 데까지 대학입학 후 6년이 걸렸다. 그렇게 어렵게 취득한 교원자격증임에도 불구하고 임용의 벽은 더욱 높고 단단했다. 특히 주요교과의 경우 지원자에 비해 TO가 현저히 적은 편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만약 내가 다시 대학교 1, 2학년으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사범대학 울타리를 벗어나 보고 싶다. 선생님이 될 거라는 굳건한 의지가 있어도 말이다. 아이들도 이른 나이에 임용고시에 합격한 선생님보다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온 선생님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 김보영·박수정, 나는 임고생이고 기간제교사입니다, 저녁달고양이,2021, 26.

 

  결국 임용TO라는 현실적 문제를 고려해, 복수전공한 심리학으로 임용을 보고자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 20대의 10년에서 이룬 가장 주요한 성취는 교원자격증을 두 개 취득한 것이다. 물론 그 안에 시간강사부터 시작해 기간제도 했고 경력도 쌓았으나 책을 읽으며 저자분들의 생각에 공감할 지점들이 참 많았다. 지금 다시 20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여행도 다니고 책도 더 양껏 읽으며 그 시기를 좀 더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20대 초반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먼 길을 돌아가고 있지만, 나중에 합격하여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을 때 그 긴 여정이 즐거운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

 

- 김보영·박수정, 나는 임고생이고 기간제교사입니다, 저녁달고양이,2021, 91.

 

 


  저자분들은 졸업 이후 임용에 올인하는 시기를 충분히 가지신 것 같은데, 기실 나는 오히려 대학원을 졸업해 국어 교원자격증을 취득한 이후, 임용고시라는 너무 큰 산을 넘기 버겁기도 하고 무서워서 회피해오고 일과 공부를 병행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20대 초반에 즐기지 못한 친구들과의 여행도 다녀보고, 뮤지컬도 보러 다녔다. 사실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 왜 몰입해 공부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도 드는데, 저자분들도 이런 나와 다르지 않았다. 일과의 병행, 올인, 취미생활 등 여러 주변환경에서 각자의 고민들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다른 결로 나타날 뿐이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지난 몇 년간, 긴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닿을 때면 시험날의 기억이 떠올라 긴장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길거리에 캐럴이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겨울을 가장 좋아했는데, 임용고시 n수생이 되고 나서부터는 찬 바람이 불면 두려움이 먼저 느껴져서 겨울이 반갑지만은 않게 되었다.

 

- 김보영·박수정, 나는 임고생이고 기간제교사입니다, 저녁달고양이,2021, 38.

 


  사범대학에 다니면서 미래에 선생님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늘 사람을 쉽게 평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 나는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성하고 뉘우치며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선생님이 되어서도 색안경을 벗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정적 고정관념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늘 그런 문제에 깨어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아직 경험과 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김보영·박수정, 나는 임고생이고 기간제교사입니다, 저녁달고양이,2021, 66.

 

 


  이런 취미활동 덕분에 길고 긴 임고생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취미활동을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면 더 빨리 좋은 결과를 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하루 20시간씩 공부만 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그 취미 때문에 숨을 잘 쉬며 버틸 수 있었다. 오래 걸리고 있지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나는 기다리는 걸 잘 하니까, 임용고시 합격도 기다리고 있다.

 

- 김보영·박수정, 나는 임고생이고 기간제교사입니다, 저녁달고양이,2021, 99.

 


  어쩌면 이런 고민과 경험의 시기가 삶에 한 번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또래들이 점점 정규직으로 취업에 성공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연차가 쌓여감에 따라 불안함이 밀려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나 또한 최대한 빨리 임용고시에 합격해 안정적으로 길을 걸어 나가야 할 지인데 하는 걱정과 조급함은 늘 존재한다. 특히 나에게는 저자 중 한 분인 김보영 선생님처럼 안정성을 쉽사리 포기하고 기간제교사로 평생을 살아갈 용기가 없기에, 임용시험은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며 삶에 필수적인 관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선택들과 내가 향유하는 여러 관계들이 부디 임용시험의 독으로 여겨지기보다 앞으로의 교직생활에 있어 중요한 거름으로 자리잡기를 소망해 본다.

 


  나는 아직 나에 대한 믿음이 충분하지 않고, 기간제 교사에 대한 못 미더운 편견에 맞설 용기가 없어. 그래서 계속 임용고시에 도전해보려고 해.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정교사가 되는 날이 멀리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대한 빠르게, 열심히 달려볼게. 정교사라는 날개가 나에게 붙여진다면, “역시 제가 자격 있던 것 맞죠?”라고 말하듯 훨훨 날아볼게.

 

- 김보영·박수정, 나는 임고생이고 기간제교사입니다, 저녁달고양이,2021, 75.

 


  서평의 말미에 이른 이제야 고백하자면, 임용시험에만 집중(올인)하고자 마음 먹고 공부를 하던 와중, 붙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고 그저 실업급여 수령을 위해 지원한 학교 두 곳에 붙은 바 있다. 어차피 두 곳에 붙었으니 한 곳은 포기해야만 했고, 남은 한 학교가 집 근처인지라 매우 많은 고심을 했다. 남은 실업급여 2회를 포기하고, 그리고 안정적으로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병행이 가능할 것인가? 현재로선 이것이 복() 혹은 기회인지 독()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고민 끝에 집에서 가까운 거리이기에 오히려 간절함을 안고 공부하며 일과 병행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왕 결정했으니, 국어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면서 전문 상담 정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하는 기회로 올해를 만들어야만 한다.

  불안함이 없지 않지만, 나는 기간제일때나 혹은 임용 합격 후 정교사가 되어서나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내 삶을 통해 모범을 보이고 가르침의 내용을 통해 그들과 소통하고픈 한 사람일 뿐이다. 때문에 지금의 나를 믿고 지금의 불안을 조금은 내려놓아 보기로 했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 두려움보다는 설렘을 느껴도 괜찮다는 저자분들의 작은 메시지가 내게는 큰 위로로 다가왔고, 완독과 함께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선물받았다.

  김보영 선생님, 그리고 박수정 선생님! 어느학교에서 동료로 만나든 함께 성장해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교단에서 뵙겠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교사의 역할은 북극성, 남십자자리와 일치한다. 교사는 북극성과 남십자자리처럼 학생들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안내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게 지식이든, 인성이든, 가치관이든,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그러니 옛날 옛적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북극성이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처럼 다양한 지식과 가치관이라는 바닷속에서 헤매고 있을 아이들에게 교사라는 별이 여전히 필요하다.

 

- 김보영·박수정, 나는 임고생이고 기간제교사입니다, 저녁달고양이,2021, 165-166.

 


  반드시 나를 존경한다고 말해줬던 반장을 비롯한 나를 진짜 선생님으로서 사랑해준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보다 더 따뜻하고 커다란 사랑으로 아이들을 아껴줄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이 될 것이다. 좋은 선생님이 되는 조건에 기간제인지 정교사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 김보영·박수정, 나는 임고생이고 기간제교사입니다, 저녁달고양이,2021, 204.

 

 


  “당신은 결국 선생님이 될 거예요. 더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한 과정을 겪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두려움보다는 설렘을 느끼셔도 됩니다.”

 

- 김보영·박수정, 나는 임고생이고 기간제교사입니다, 저녁달고양이,2021, 283.

 

 

by papyros 2021. 5. 26. 02:29

안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 하모니북, 2020.

https://indiepub.kr/product/detail.html?product_no=1419&cate_no=25&display_group=1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해당 도서는 독립출판 플랫폼 인디펍으로부터 서평 작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히 교육은 행복해지려고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적어도 내가 학교 다니면서 본 친구들 중에 90% 이상은 학교 때문에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학교가 끝나거나 방학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행복해보였다.’

 

- 안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 하모니북, 2020, 18.

 

  핀란드. 주지하듯이 한국 교육계에서는 늘 교육현장의 모범사례로 선망받는 교육현장이 바로 핀란드의 교육이다. 제목과 표지를 보고 이 책에서는 핀란드의 무엇을 말하고 있을지, 과연 핀란드 교육의 행복비결을 바로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을지 궁금증을 안고 이 책을 펼쳤다. 경쟁식 교육으로 모두가 지쳐있는 한국사회에 대비되는 핀란드의 교육.

  저자도 나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교환학생으로 핀란드에 갔다고 한다. 저자의 표현처럼, 학생이 행복하지 않은 교육이라면 과연 무슨 의미인 것인가. 나는 중학생 때부터 국어교사를 꿈꾸며 살아왔고 최근까지 국어 기간제교사로 일해왔지만(지금은 전문상담 임용을 준비하며 전문상담 기간제교사로 근무중이다.) 학교에서는 교사도 학생도 행복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교사(특히 주요교과교사의 경우 더욱)는 수업시수도 많은데 과도한 행정업무까지 떠안게 된다. 출제와 수행평가, 행정업무가 반복되다보면 지칠 수밖에 없다.

  핀란드의 교육은 과연 어떻게 다를 것인가. 이미 방송 등 매체를 통해 접한 바는 있지만 실제로 교환학생을 하며 핀란드의 대학교육을 체감한 저자의 글에 기대감이 컸던 것은 바로 내가 교직에 나아가길 희망하는 한 청년으로서 한국 교육이 변화되기를 진실로 소망하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선택한 이유였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무언가를 추가적으로 열심히 한다. 영어공부나 운동, 독서가 대표적이다. 그것을 하는 이유가 스펙을 위해서 혹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더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좋다. 더 노력해서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자율권을 얻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 좋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부리는 것이다. 모두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다.

- 안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 하모니북, 2020, 20.

 

  모두가 깊은 사유를 통해 가치관과 세계를 위한 무언가를 해 나갈 시간보다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한국 사회와는 대조적으로, 핀란드는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공동의 가치관을 위하여 노력하는 개인을 위해 사회공동체가 함께 발을 맞추는 선택을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채식에 대한 일화를 언급하는데, 한 개인의 실천이 거대한 집단,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핀란드 사회의 건강한 신념과 선순환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한국 사회의 경우 채식을 하는 개인을 소수자로 취급하면서 심지어는 채식하는 개인에 대해 보여주기식이 아니냐는 비판어린 시선까지 따라붙는 경우를 왕왕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채식을 하는 이유는 굉장히 다양했지만, 주된 이유는 역시 지속가능성의 관점이었다. 한국의 미세먼지와 핀란드의 아름다운 자연의 대비를 통해, 자연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극적으로 체험하고 있을 때였고,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채식을 실천하고 있었다. 핀란드에서는 특히 개인이 집단을 이룬다는 사고방식이 강하다. 집단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 개인이 함께 모여 집단을 만든다. 그렇기에 한 개인의 행동, 윤리적, 도의적 책임의식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개인의 행동이 쌓여서, 그리고 서로 영향을 주면서 한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 안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 하모니북, 2020, 49.

 

  또한 뒤이어 나오는 기후변화를 위해 학생이 시위를 하며 등교거부를 하는 -일화도 인상적이었다. 학생 개인의 정치, 사회적 신념을 인정하고 학생이 신념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존중하는 것인데, 학교교육에서 함께 사회 현안을 공론화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도, 사회적 인식도 부족한 현실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개발이 가능할지 스스로 공론화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시급하다. 한국에서는 아직 금요일에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올해부터 만 열여덟 살인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도 투표권을 부여받게 된 만큼, 학생들을 ‘어린 존재’ ‘피교육자’로서만 대하기보다는 이제 그들이 ‘자율성’과 ‘주체성’을 지닌 존재이며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책임이 있는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교육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 교육에서는 학생들을 ‘수동적 존재’로서 바라보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학생들이 금요일에 학교에 오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교사들은 이것을 관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교사는 이 운동을 권장해야하며, 그 운동을 그저 결석의 구실로만 다룰 수는 없다. 교사는 학교에서 이 운동을 타협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이미 파업에 참여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권장하거나 파업을 소개하고 파업 동기를 설명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과 같은 어린 학생으로부터 시작된 운동은 학생으로서 영감을 쉽게 받을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행동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학생들은 실제 행동 단계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할 수 있고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교육자로서 학생이 학교와 실생활에서 지속가능성을 위해 할 수 있는 행동 단계를 소개해야 한다.

- 안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 하모니북, 2020, 64-65.

 

  성 역할 고정관념에 대한 교육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사실 어른들의 고정관념이 발화되고 무의식적으로 표현되면서 어린아이들의 고정관념이 생기는 만큼 핀란드의 아동교육은 성 중립성을 지키고자 상당부분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 핵심이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타 성별에 대한 혐오발언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데, 그 기저에 성 중립성보다는 성 역할 고정관념을 확대시키는 어른들의 발화가 아이들의 내면에 뿌리깊게 내재화되고, 나아가 학교교육 내에서 경험한 개개인의 성 정체성으로 인한 경험이 이를 심화시켰다고 여겨진다.

 

 


  성 중립성 학교에서 교사가 되려면 스웨덴 LBT권익 연맹(Shutts, Kenward, Falk, lvegran & Fawceet, 2017)이 제공하는 종합적인 교육(기간 6~8개월)을 사전에 받아야만 해당 학교에서 교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들의 교육은 교사에게 학생을 성 역할에 구애되지 않고, 보다 포괄적이고 동등한 환경을 만들기 위한 방법론을 제공한다.(RFSL, 2019.)

  교사들은 학생들과 대화할 때 성별에 구애받는 언어들을 피하고, 전통적으로 한 성별만을 대상으로 한 행동을 피한다. 또한, 어린아이들은 수많은 동화와 노래 등을 통해 전통적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을 학습한다. 대표적으로 미녀와 야수는 납치당한 여주인공이 납치한 괴수에게 사랑에 빠지는 스톡흘름 증후군의 이야기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잠에 들어 있는 공주님을 멋진 왕자님이 구해주는 이야기다. 남성에게는 능동성이, 여성에게는 수동성이 관념적으로 내재되어있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문제의식을 느껴 더 다양한 정체성과 가족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이야기, 노래 및 기타 교육 자료를 수정하도록 훈련받는다(Shutts 등, 2017). 작품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많은 문학작품들이 백마 탄 왕자님이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공주님을 구하는 일변도로 구성되어 있어 다양성의 부재가 문제인 것이다.

 

- 안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 하모니북, 2020, 89-90.

 

 

  마지막으로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바로 제 5, 경쟁이 없는 학교에서 언급하는 핀란드 사회의 교육에 대한 가치관이었다. 한국 교육은 고정형 사고방식으로 인해 한 개인이 정체성을 성공’, ‘성취’, ‘성적을 기준으로 형성하기 쉬운데 한국 교육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성장형 사고방식’을 지닐 필요가 있다.

  독자로서의 나 또한 사실 평가에 예민한 학생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저자처럼 모든 분야에 성적이 우수하지는 않았지만, 학창시절 학습태도가 바람직해 모범생으로 불렸고 그 정체성을 깨기 싫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학, 대학원에 진학해서까지 그 정체성을 유지하느라 한 번도 대학 수업시간 중 대출을 하거나 수업을 빼고 여행 가는 과감한 행위를 해 본적이 없는데 30을 코앞에 둔 지금에 와서는 그런 경험을 한 친구들이 더욱 부러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대학원에서까지 좋은 학점을 유지하는 데 스트레스를 받는 , 그런 학생이었다. 교사를 꿈꾸게 된 이유도,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정체성을 근간으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만나게 될 미래 세대의 아이들은 나처럼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 평가에 예민한 사람으로 자라게끔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순간순간 경험하는 자신의 선택에서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성장형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학점보다는 과감히 여행을 떠나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아이들로 키워내고 싶다. 어쩌면 학교교육의 ‘과정중심평가’ 도입이 그 시작이리라 여기지만, 아직도 많은 변화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평생 1등만 할 수 있는 학생들은 극소수다. 언젠가는 그 정체성이 깨지게 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공부를 잘해 그 정체성을 오래 유지하는 학생일수록 그 정체성이 깨질 때 타격이 크다. 그래서 오히려 전교 1등, 명문대학교 학생들이 갑자기 정체성을 잃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보다는 그들의 노력, 과정에 칭찬을 해주는 정체성을 부여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꾸준한”, “언제나 성장하는” 등의 정체성을 주어야 한다. 이 정체성은 상황이 바뀌어도 내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끝까지 유지할 수 있다. 어렵겠지만 평가 역시 위를 바탕으로 할 방법을 고안해 보아야 한다.

  캐롤 드웩교수의 정의를 빌리자면 고정형 사고방식(Fixed mindset)보다는 성장형 사고방식(Growth mindset)을 학생들에게 부여해야 한다.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진 학생들은 어려운 문제를 자신에게 닥칠 시련이나 방해요소로만 보아 기피하는 반면,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학생들은 같은 상황을 넘어서야 할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 안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 하모니북, 2020, 128-129.

 

 

  전체적으로 이 책은, 전문상담교사로서 한 평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내게 교사로서의 지침서 같은 책이었다고 여긴다. 미처 서평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하는 인종차별혐오발언에 대한 부분까지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다수자, 강자에 속했을 때 소수자를 차별하지 않는 최소한의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혐오 발언이 급증하고 있는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소양은 ‘공감능력’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바로 공감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간접경험인데, 하단부 저자의 표현이 내 마음과 너무나도 같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교사로서, 특히 전문상담교사로서 갖춰야 할 중요한 소양은 공감능력’, ‘(다양한 상담기법을 활용할 수 있는)상담자로서의 학문적 역량’, ‘성 중립성등 외에도 풍부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이루는 가장 큰 두 축이 책과 영화인 만큼 지금껏 내가 너무나도 좋아해 즐겁게 읽어오고 보아온 영화들이 전문상담교사로서의 내 역량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여긴다. 내담학생들에게 이것이 전달된다면 내담학생들은 또 누군가에게 이를 전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어떤 곳에서도 주류이기 때문에 차별을 한 번도 당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마음 깊은 속에서 차별은 나쁘다고 느껴지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인류가 위대한 발견을 한다. 그것이 바로 글과 스토리의 위대함이다. 소설이고, 영화고 예술이다. 자신과 전혀 다른 상황 속에 대입하고, 공감하는 능력. 그것이 인간이 가진 위대함이다. 그래서 인류는 예술을 향유하고, 만든다. 내 글을 읽고 분노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아시아인은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분노하기 쉽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이 주류가 되었을 때, 상대적 강자가 되었을 때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을 멀리해주길 바란다. 자신이 소수일 때 경험했던 차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 어떤 마음을 속에 새겨서 다른 사람이 그 경험을 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 안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 하모니북, 2020, 151.

 

 

  이 책의 저자는 한국 사회 내에서는 학문적으로도(소위말하는 명문대학생) 성별로도 다수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책의 도입부 군대에 지원했다는 표현이 나오지만 책을 읽어내려가다보면, 특히 후반부인 인종차별 부분에서는 어? 이 작가님이 여성이셨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다수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타자를 위한 배려를 통해 그 깊은 사유가 엿보였다.

  핀란드에서의 14개월을 통해 느낀 점을 책으로 내어주신 저자분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마지막으로 , 저자분이 핀란드 대학 교육학 시간에 경험한 내용을 상기하며 서평을 갈무리하고 싶다. 나의 대학 시절에도, 저자와 같은 교수님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교육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셨는데, 학생과 수평적이며 신뢰로운 관계를 맺고 표면에 보이는 부분보다는 이면을 보시며 따듯한 시선을 견지하셨던 교수님의 교육철학이 내 교육철학을 형성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내가 Martin Buber(마르틴 부버)의 ‘만남의 철학’에 가장 크게 공감하는 이유도 그 영향이 크다.

  이 책에서도 그와 유사한 부분이 나오는데, 앞으로 평생 교사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나는, 아래 문장을 평생 담으며 살아가고 싶다. 부디 내가 30년 후에 꼰대 교사가 되지 않고 모쪼록 상담시간 중 점심을 먹는 내담자의 이면에 있는 욕구를 진정성있게 공감하는 따뜻한 상담자(전문상담교사)’로서 자리하기를. 30년 후에 이 글을 다시 볼때도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핀란드에는 학교 내에 엄격한 계급제도가 없다. 학생이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교사는 가르치는 방법이나 내용을 선택하는 데 더 많은 자유가 있다. 학생들은 학교를 자유롭게 느낀다.

 

- 안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 하모니북, 2020, 121.

 


  수업이 정말 자유로워서 수업 중에 음료를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예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충분한 교사와 학생간의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식사를 할 때 교사의 시선은 “수업이 바빠 식사를 할 시간이 없었구나.”의 따듯함을 유지하고 있다.

 

- 안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핀란드, 하모니북, 2020, 116.

 

 

by papyros 2020. 10. 31. 21:48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해당 도서는 독립출판 플랫폼 인디펍으로부터 서평 작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아시아의 마지막 보석이라 불리는 미얀마의 작은 도시 인레에는 두 명의 피셔맨이 있다. 머니 피셔맨과 노 머니 피셔맨. 그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한다. 내가 감히 어떻게 그들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노력과 노동이 있었기에 아름다운 여행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삶을 잠시나마 엿보는 일. 그 순간을 우리는 여행이라 부른다.

-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169.

 

 조아연 작가의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이 책은 이번 독립출판 서포터즈 7기 활동을 위해 선택한 도서들 중 그 어떤도서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여행에세이였다. 기실 코로나로 인해 여행도 마음 편히 가지 못하는 시대에, 대리만족의 욕구때문일까, 여행에세이로나마 간접적으로 여행을 하고싶은 욕구가 큰 요즈음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예상외로 마음에 와 박는 귀한 문장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20대의 끝을 불과 1개월 여 남겨두고 있는 지금, 작가님과 달리 나는 20대를 학업으로만 보냈다. 대학-대학원-대학원. (두 번의 대학원이 석사-박사가 아닌 석사-석사라는 다소 슬픈 이야기는 차치하자.)

 그렇기에 젊은 시절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며 소회를 옮기고 멋진 사진들을 찍고 사람들을 만난 작가님의 여행이 참으로 부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여행 자체보다는 여행을 통해 느낀 작가님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그 사유의 흔적들이 더욱 부러웠다.

  꼭 작가님처럼 많은 여행을 갈 필요는 없다고 느낀다. 단 한 번의 여행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는 주체인 여행하는 나의 사유.

  유년기의 나와 어른이 된 나는 그 본질적으로는 같은 사람이지만 경험세계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바라보면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그 양질의 경험을 채워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여행이 아닐까. 나 자신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 그리고 타인의 오롯한 삶을 바라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을 조금 더 분명히 하기 위해.

  그런 면에서 <팔찌 파는 10>에 등장한 소년의 일화는 지금 이 순간 어른으로 살아가는 나를 반성하게 했다.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야 할까.

 만 289개월 7일을 살아왔음에도 아직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아직도 누군가와의 관계에 슬퍼하고 그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지만, 부족한 부분을 포함한 그 모든 내 모습들을 안고 나의 길을 떠날 때 뜻밖의 변화를 만나는 것처럼, 여행도 그렇지 않은가싶다.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면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라고 했다.

  나도 언젠가 떠나게 될 또 한 번의 여행에서 2020년, 스물아홉의 나와는 다른 또다른 나의 모습을 새로이 발견하기를....... 그리고 나의 여행에서 만나게 될 또 다른 열 살 소년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기를, 상처를 넘어서 누군가의 상처를 포근하게 감싸는 존재로 여행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4다르함(500원)을 내면 마실 수 있는 순도 100% 오렌지주스, 혹여 소매치기를 만날까 복잡하고 긴장되는 골목길, 12시간이 넘는 버스를 타야 하는 일, 호스텔에서 무료로 주는 싸구려 비누로 세수하기와 같은 것들이 일상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아마도 이런 일상이 일상적이지 않은 순간이 될 때까지 난 여행을 할 것이다. 길고 긴 여행이 끝나면 이 복잡하고 어려운 메디나 골목조차 그리워질까. 그때가 되면 내 안경에 남겨진 검은색 나사를 바라보며 문득문득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될까.

-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23.

 


  초등학교 앞에서 팔던 불량식품, 컵 떡볶이, 선생님 몰래 흰 우유에 몰래 타 먹던 초콜릿 가루 이런 것들이 이제는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이제 마카롱 하나로는 행복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된 나는 그때처럼 따뜻하고 작지만 사랑스러운 것들에 쉽게 감동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수많은 계절이 바뀌는 동안 입맛이 변했고 취향이 변했고 좋아하는 것들이 변했기에 그때 느꼈던 감동은 당연히 존재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조금씩 착실하게 날 변하게 했다.

-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29.

 


  우리의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거운 순간을 살아 내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마음의 상처 또한 내가 가지고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비록 흉터가 남을지라도 그 자리에는 딱지가 올라오고 새살이 돋는다. 마치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이 오는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추운 계절은 끝이 난다.

  시간이 지나 엄지발가락이 수영해도 괜찮을 만큼 나았다. 오랜만에 들어가는 수영장은 여전히 차갑고 시원했다. 발가락의 흉터는 없어지지 않겠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흉터가 남는다고 내가 행복하지 못할 단 하나의 이유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엉망으로 상처 입는다고 해도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매년 상처와 흉터는 늘어나겠지만, 그것조차 끌어안고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57.

 


  열 살 무렵 나는 매일 용돈으로 500원을 받아 슬러시를 사 먹고 남는 돈으로 만화책을 빌려보거나 스티커를 사곤 했다. 엄마가 가직 싶은 비싼 바비 인형을 사주지 않아서 슬픈 것 빼고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초등학생이었다. 옛 잉카 왕국의 수도 쿠스코에 사는 초등학생이라고 나와 다를까 싶었다. 달콤한 군것질거리와 좋아하는 장난감이 있다면 행복할 나이. 열 살은 그런 나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열 살이라고 씩씩하게 말하는 소년은 말을 이어나갔지만, 스페인어를 못 하는 나는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얇은 옷을 입고 차가운 바닥에 앉아 씩씩하게 물건을 팔고 있었던 그 아이의 꿈은 뭐였을까. 좋아하는 운동은 뭐고 좋아하는 음식은 뭐였을까. 미처 건네지 못한 질문들이 마음에 울렁거려 코끝이 시큰거렸다.

- 조아연, 여행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모니북, 2020, 145-147.

 

 

 

by papyros 2020. 10. 28. 01:56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https://ridibooks.com/books/1849000035?_s=search&_q=%EB%82%9C+%EA%B0%80%EB%81%94+%EC%95%84%EB%B9%A0%EB%A5%BC+%EC%A3%BD%EC%9D%B4%EB%8A%94+%EC%83%81%EC%83%81%EC%9D%84+%ED%95%98%EA%B3%A4+%ED%95%B4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해당 도서는 독립출판 플랫폼 인디펍으로부터 서평 작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책의 제목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라니. 프로이트의 꿈분석에 관한 내용일까? 아니면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할 정도로 아버지의 존재가 부정적이라는 걸까. 후자겠지? 하며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기실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은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지나친 가부장적인 면(아마 그 연배의 대부분 분들이 그러하겠지만)은 부정적으로 지각하고 있다. 때문에 책의 내용이 좀 더 궁금해졌다.

 마치 『안네의 일기』나 『징비록』과 같이 이 책은 작가 본인의 일기장이었다. 작가는 몇 년동안 꾸준히 일기를 써내려갔는데, 저자의 일기가 기쁘고 즐거운 일들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언젠가 법정에서 쓰일 날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 마음 한 켠이 무거웠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가족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일삼는 알콜중독자 아버지로 인해 저자(해열)의 가정은 늘 살얼음판만 같다. 저자는 삼남매의 맏이인데, 행여 동생들이 아버지의 주취와 폭력을 알게 되지 않을까-를 저자 본인도 어렸던 청소년기부터 걱정하고 불안해했다.

 


  “치워야 해. 깨뜨릴지도 몰라.” 덜덜 떠는 손으로 제일 먼저 어항을 치우던 엄마. 그 모습을 본 내가 받은 충격이란. 엄마는 그때 내가 깨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미 우리 집은 무너진 모래성이라는 걸.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번 아빠를 믿는, 아빠가 변화되리라 믿으며 주님께 간구하는 저자의 모습을 통해 참으로 많이 속이 탔다. 가정해체를 야기한 당사자는 그대로인데 고통받는 것은,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족들이라니. 가해자-피해자의 불합리한 힘의 관계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혈연이라는 끈으로 맺어졌기에......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저자의 마음이 너무 절실했다.

 폭력의 주체가 타인이 아닌 가족이기에, 아빠이기에 더 괴로웠을 것이다. 작품을 읽으며 저자의 부친이 보이는 폭력과 그 가족들의 대응에 대해 이해와 공감과 더불어 답답함과 분노가 함께 느껴지곤 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을, 가족 구성원들을 지켜내고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주님, 제가 함부로 아빠를 판단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는 모르잖아요, 아빠를 통해 주님이 무엇을 행하실지. 제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도록 좀 도와주세요. 주님, 또다시 반복되는 밤들을 통해 제가 느껴야 하는 것들이 뭐죠? 아니면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나요?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학교 갔다 집에 오는 게 두렵다. 아빠가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면 좋겠다. 무서운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만약 액자를 부수다가 갑자기 어딘가에 꽂혀 우리에게 돌진하면.. 우린 속수무책으로 그냥 맞는 거다. 아빠 몸짓 하나에 모든 사람이 자는 척 숨죽여 떨고 있다.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람이란 게 이런 건가 보다. 두렵고 무서울 땐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가도 그 대상의 약한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미워하는 마음은 사그라진다. 아빠의 풀이 죽은 모습은 내 약점이다. 그저 아빠도 불쌍한 한 인간이겠거니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몇 주 전, 또다시 악몽에 시달리면서 언젠가 일이 터질 거란 걸 예감하고 침대 밑에 야구 배트를 갖다 놓은 내가, 더 이상 비극이 시작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야구 배트를 챙겨 놓은 내가 밉다.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특정 분위기 특히, 성인 남성이 언성을 높이면 그게 어디가 됐든, 누구든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우리 가게는 시장 입구에 있어서 ‘저녁’엔 술 취한 아저씨들이 자주 온다. 하지만 오늘같이 대낮은 예외다.

  게다가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취객이라니. 초점 없이 풀린 그의 동공에서, 아무렇게나 질러대는 목청과 따로 노는 손짓에서 나는 아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무섭다. 또 가슴이 뛴다. 그리고 측은하다.

 저 사람도 누군가의 아버지, 아빠. 그럼 누군가는 집에서 도어락 소리를 두려워하고 있을 텐데.

 들의 두려움을 너무나도 잘 아는 내가 측은하다. 결국 나나 당신네나 우리 모두는 다 측은한 존재일까.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와 가족들이 분리된 이후 저자가 20대에 이르러 대학에 들어가 영화를 전공하면서 나타나는 저자의 생각이나 감정의 결은 더욱 섬세하다. 대학에 진학해 영화를 전공하는데 자신의 작품에 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 걱정하는 저자의 모습.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감독인 나 자신이고, 나의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라고, 나는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아주 친한 사람들 소수 외에는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는 모습들… 저자가 느끼는 만성적인 우울감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일기 속에 엿보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한켠으로 나는 저자의 20대를 읽어 내려가며 안도했다.

 비록 가정폭력의 PTSD로 내재된 심리적 문제가 자주 신체화 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자기 주체를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주어서,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사실 20대에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걱정하는 건 당연한 것이지 않나. 그런 마음을 품으며 책을 읽어내려갔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저자의 취향이 엿보일 때는 나도 함께 기뻐했다. 치유와 안정감을 야기하는 반 고흐의 그림이라든가, 김애란 작가를 좋아하는 저자의 취향들. 그래 이 작가 나도 좋아해! 하는 마음에 공감이 되었다. (나도 신뢰하는 이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좋아하는 게 많을수록 그게 그만큼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책을 읽어내려가며 저자의 취향에 대해, 저자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랬다.특히 저자가 만든 영화가 궁금해졌다. 주제가 반복되면 어떤가. 저자가 언급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처럼- 가족에 대한 주제로 계속 영화를 만들어도 각각의 영화가 모두 다른것처럼, 해열작가님 또한 ‘아버지’라는 한 주제를 통해 다양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그만큼 진솔하고 섬세한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주겠지. 글도 이렇게 호소력이 있는데 영화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반 고흐 전> 보러 혼자 서울에 갔다 왔다. 이제 혼자서도 잘 돌아다닌다. 대형 스크린으로 보는 빈센트의 그림들은 정말이지 끝장났다. 여기서 살고 싶다는 마음밖에 안 들었다. 고흐 그림을 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자주 봐서 그런가? 게다가 그의 일생을 알아버린 이상 그는 내 평생의 스승이자 동료이고 하나뿐인 연인이다. 나는 빈센트만 편식한다. 그의 그림이 내 활력이 되어주니 이보다 더 좋은 영양제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나는 빈센트만 편식한다. 동경한다. 편애한다.  그의 푸르고 노란 그림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내겐 위로고 안정제다. 빈센트의 마음이 너무 예쁘다. 그의 마음이 그림에도 스며들어있는 거 같아 놀랍다. 서울에 갔다 온 뒤로 내 책상엔 빈센트가 더 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해지는 건 취향뿐 이다. 난 어쩜 이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신기하다.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졸업 작품은 좀 다르게 찍고 싶었다. 1학년 때의 그 첫 작품이 또 나올까 봐 두려웠다. 이건 지금도 여전하다. 유명한 감독이 ‘감독은 평생 하나의 작품만을 만들 뿐이다.’라는 말을 했다. 갈수록 그 말에 공감한다. 내 마지막 작품은 곧 내 첫 번째 작품의 모방이 될 것이며 결국 나는 일생동안 하나의 영화만을 찍어낼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자기 복제만 끊임없이 하다 죽을까 봐 겁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어. 아직 내 안에 아빠에 대한 얘기가 나올 게 많은가 본데.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기실 이 숨기고만 싶은, 누군가에게 공개하기에는 슬픔과 고통으로 채워져있는 자신의 일기를 책으로 출간하겠다는 결정을 하고 편집의 과정을 거친 작가님의 그 용기가, 계속해 나아가고 성장해가는 작가님의 모습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빠른)92년생 독자 한 사람이 95년생 해열작가님의 행보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앞으로 세상에 나올 작가님의 더 많은 이야기를 기다리는 한편, 나도 머지않은 시일 내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어 그 때는 해열작가님이 나의 독자가 되고 나는 해열작가님의 관객이 되기를 깊이 소망해 본다.

 


  나는 자꾸 시도한다. 생각하고, 공부하고, 느끼고, 표현하고 흔적을 남긴다. 자꾸 남긴다. 아직 미완인 것들이 많다. 내 작품이지만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도, 또 반대로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싶은 것도 있다.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난 왜 이런 걸까? 사실 성장이나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시간 같은 것들은 애초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거고, 일어나야만 했기에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뿐 결국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건 인간이다. 그러니까 같은 일을 겪어도 누군가는 파국으로 누군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장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성장 할 것인가? 파멸할 것인가?

- 해열, 『난 가끔 아빠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인디펍, 2020.

 

 

by papyros 2020. 10. 26. 13:55

 

김정례, 『사모님, 구텐 모르겐』, 문예바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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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도서는 독립출판 플랫폼 인디펍으로부터 서평 작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사모님, 구텐 모르겐.’ 책 제목과 더불어 책 소개 페이지에서 아, 독일 생활을 적은 에세이구나! 하는 마음에 자연스레 마음이 갔다. 독일 이민과 독일에서의 삶과 교육을 적어내려간 책이려니, 생각하고 책장을 펼쳐내려갔다.

 저자는 개신교 교회 목사님의 아내로, 90년대 중반 먼저 유학길에 오른 남편의 뒤를 따라 독일에 이민하게 된다. 저자에게는 세 아이가 있는데 차례로 ‘결, 길, 힘.’이다. 내 나이와 저자의 아이들 중 ‘길’의 나이가 엇비슷해 보여 괜히 세 남매 중 길의 에피소드에 마음이 갔다.

 작품의 여러 내용 중 특히 인상깊은 점은 저자가 독일에서 아이들의 한글(모국어)교육에 힘쓰며 아이들을 한국 학교에 보내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최근 이중국적이나 다문화가정, 해외거주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겪는 문제와 맥을 같이한다. 즐겨보는 다음 웹툰 <딩스,뚱스,땡스>라는 만화만 보아도 미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살다 귀국한 아이 땡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모국어 정체성문제, 학교부적응 등의 문제를 겪는 부분들이 그려지는데, 그러한 맥락에서 저자가 독일에 살면서도 얼마나 자녀들의 한국적 정체성과 한글 교육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을지 그 과정이 너무나 생생히 그려졌다. 서로 다른 두 국가의 문화와 언어를 모두 습득한다는 것이 분명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이를 위해서는 교육자/주 양육자들의 아이들에 디핸 신뢰와 기다림, 지속적인 대화가 필수적이지 않은가 싶다.

 

 에세이를 통해 아이들의 유년기부터 성장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내 또래의 친구들이 커가는 모습을 살펴본 듯한 기분이 들어 무언가 유대감이 형성되기도 했다.

 다만 이 책에서 전체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개신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다보니 후반부로 갈수록 종교적 색채가 짙어진다는 점인데, 종교적 색채가 짙어지는 것은 그만큼 저자의 삶을 지탱해온 데 개신교 신앙이 가장 우선순위에 놓이며 그 삶의 결과 가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의미이겠으나, 다만 독일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는 독일문화와 독일의 학교교육에 대해 더 알고싶어 선택했던 책인지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by papyros 2020. 10. 19. 13:52

 

채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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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수는 있다.”

- 채샘, 「4부」 서문,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분홍빛이 감돌아 마치 힐링을 줄 것만 같은 에세이로 보이는 이 책은, 표지와는 달리 결코 가볍게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는 아니다.

 문체는 가벼우나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닌 이유는 바로 저자가 도박중독자의 가족으로서 경험한 내용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있다. 그리고 이는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전문상담교사 임용을 준비중이긴 하지만, 아직 임상경험도 상담장면에서의 상담 경험도 이제 겨우 한 발 내딛은 내게 도박장애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욕구와 더불어, 도박중독자의 가족들이 지니고 있는 심리정서적 문제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120쪽에도 약술하고 있듯이 도박장애(Gambling Disorder)는 DSM-5 편람 상 물질사용 및 중독성 장애(Substance Use and Addictive Disorder)의 아형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 진단기준은 아래와 같다.

 

[DSM-5의 도박장애 진단기준]

4개 이상= 도박장애, 2~3개=준임상 도박장애

(4~5개: 경증 Mild, 6~7개: 중등도 Moderate, 8~9개: 중증 Severe)

A. 지난 12개월 도안 다음 중 네 개(또는 그 이상) 항목에 해당하는 도박행동이 비적응적인 성격을 띠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1. 집착(Preoccupation with Gambling): 지난 도박의 좋은 기억, 도박계획, 도박자금 마련 등에 집착하여 일상생활이 곤란해진다.

2. 내성(Tolerance): 원하는 흥분을 위해 판돈을 올릴 필요성을 느낌.

3. 통제력의 상실(Loss of control): 도박을 줄이거나 끊으려는 노력의 반복적 실패

4. 금단증상(Withdrawal): 도박을 줄이거나 끊으려 할 때 초조, 안절부절, 성마름

5. 회피(Escape): 문제나 나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박함

6. 추격매수(Chasing):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도박함

7. 거짓말(Lying):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도박을 숨김

8. 대인관계, 일 등에 부정적인 결과(Negative consequences): 관계손상, 가족 및 사회관계 직업, 학업 등 위태, 상실

9. 구조요청(Bailout): 도박으로 인한 재정문제로 도움 요청.

B. 도박행동이 조증삽화에 의하지 않는다.(조증의 증상으로 도박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조증삽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12개월 이상의 지속성을 지니고 도박에 집착하며 도박에 대한 통제력(조절능력)을 상실, 금단증상을 겪고, 재정문제로 인해 주변인들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주요 증상들이 4개 이상이라면 임상심리사들에 의해 도박장애로 진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서평에서 이런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등의 문제는 차치하고 싶다. 심리학 전공자이며 전문상담교사 임용을 준비중이긴 하지만 내가 임상전문가인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저자가 들려주는 그동안의 분투와 삶에 깊이 공감하며 몰입해 책을 읽었다.

 특히 저자는 도박중독을 겪는 가족이 그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쌍둥이오빠였다는 점에서 더욱 힘이 들었을 것 같다. 차라리 일반 형제나 자매라면 어느 정도 선에선 타인과 마찬가지로 심리정서적 분리가 가능하지만,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쌍둥이’이기에 이미 성장과정 상 공유해온 내면세계가 깊이 자리했기에 저자가 우울증과 무기력을 겪을 정도로 순교자형의 공동의존 형태까지 겪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조심히 생각해 본다.

 저자 본인이 그녀의 쌍둥이오빠 현이 도박중독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가족 구성원 중 가장 먼저 알게 되었기에 저자는 오빠와 부모님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느라 그녀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버린다. 물론 도박중독 문제를 겪고 있는 저자의 오빠 본인에게도 그 고군분투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스쳐가고 어려움을 겪었겠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달은 바는 심리와 적응으로 인한 것인지, 혹은 신체적 어려움으로 인한 것인지를 막론하고 모든 질병들은 그 질병을 겪는 환자 본인과 더불어 가족들이 그 치료의 여정을 함께 지난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한명의 도박중독으로 인해 저자는 우울과 무기력을 겪는가 하면 지난세월 자녀의 성장과 교육에 헌신했으나 그 지난 삶을 모두 부정당한 듯한 느낌을 받는 어머니, 아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난다. 자가 작품 중간 인용한 사티어의 이론처럼, 가족 구성원 한 명의 문제가 가족 전체로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가족 치유의 어머니’로 불리는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상담가 버지니아 사티어(Virgina Satir)는 가족을 천장에 매달아 놓는 장난감 모빌에 비유했다. 모빌의 어느 한 부분이 움직이면 전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가족은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을 미친다.

- 채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175쪽.

 

 때문에 질병을 앓는 환자 개인 뿐 아니라 환자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 가족, 친구 주변 사람들 역시 함께 치료받아야 할 대상임을 우리 사회가 더욱 깊이 인식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저자가 개인상담을 받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녀 스스로를 자책하는가 하면 오빠의 일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쏟아야만 했던 것은 질병을 앓는 이의 가족도 치료의 주체라는 인식 없이 질병을 앓고 있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일반적인 사회의 요구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가족이 고통을 넘어 치유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들이 도박중독은 ‘완치’가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벗어나 ‘단(斷)도박’의 기간을 유지하는 것임을 인식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도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과잉기대도, 도박중독이 장애가 아니라고 여기며 ‘부정’하는 것도 아닌 도박장애의 실체와 그 문제를 ‘직면’하는 것부터 시작했기에 그 치유의 여정이 열렸던 것이다.

 특히 저자의 가족에게는 가족상담보다도 ‘자조집단’을 통한 집단상담이 더욱 유의미했는데, 어쩌면 중독 관련 자조집단 모임의 특성 상,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개방’을 통해 응집력을 지닌다는 점이 강점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의 오빠 현뿐만 아니라 저자도 함께 모임에 꾸준히 나가는 것은 가족구성원들의 자조집단에서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평가하거나 염려,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은 경험을 한 이로서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안전감을 통한 응집력의 형성이 중독치료에서 얼마나 중요한것인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곱씹을 수 있었다. 비단 중독모임 뿐만 아니라 상실과 같은 외상경험(PTSD)을 겪은 이들도 그러할 것이다.

 


 “중독문제가 없는 이들은 내 삶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오늘도 살아갑니다. 삶의 변화를 꿈꾸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방법도 모르고 의지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중독자는 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문제를 벗어나고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을 가리켜 회복자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삶이 회복중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내 삶이 회복 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 채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219쪽.

 특히 이 에세이에서 나 자신에게 경종을 울린 부분은 후반부에 등장했는데, 사실 우리 모두 누구나 조금씩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자의 오빠 현처럼 도박중독이라는 진단이 꼭 내려지지 않더라도, 혹은 알콜중독이 아닐지라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누구나 어딘가에 중독되어있다. (나만 해도 설탕과 밀가루 중독이 아닌가......! ) 개인적으로, 다이어트 중이라 최대한 초콜릿과 같은 군것질거리와 밀가루와 튀김과 같은 음식을 멀리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나 또한 이러한 중독에서 멀어지기 위한 노력을 나름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꼭 진단이 내려지지 않더라도, 현대인은 누구나 대상이나 정도의 차이 있을뿐 다소간의 중독을 겪고 이는데 이를 인정하고 자신을 ‘회복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켜나가냐, 혹은 자신이 무언가에 중독되어있다는 사실 자체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그 삶에 안주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이 책이 평이하고 편안한 어투로 쓰여져 가독성이 있었음에도 결코 ‘가볍지’ 않았던 이유는 이 책의 저자 본인이 겪은 ‘외상과 치유의 경험’을 고백하고 깨달음을 나눔으로써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의 치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4년 전, 출간 후 화제가 되었던 수 클리볼드의 저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은 바 있다. 그 책 또한 미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학생의 어머니가 총기난사 이후 그녀가 마주한 삶의 변화와 체득한 내용을 책으로 출간한 것인데, 수 클리볼드의 이 책도 그리고 저자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라는 이 책도.. 두 책은 모두 그들이 겪은 외상의 경험을 책의 제재로 잡아 다른 치유의 가능성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내가 교사가 되고자 했던 동기가 내 유년시절 너머 외로움의 기억과 이를 보듬어주신 좋은 은사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었듯, 이 책이 누군가에게는 변화와 성장의 동력이 되리라 여긴다.

 때문에 이 책의 독자로서, 내가 지닐 수 있는 몫은 상담자(전문상담교사)로서 도박중독을 겪고있는 청소년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단(斷)도박을 위해 조력하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책을 주변사람에게 널리 알리는 것, 그리고 언젠가 나 또한 내 삶의 체험과 상담교사로서의 경험들을 함께 나누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자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족한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해 주고, 새로운 목표를 지니게 해 준 이 책의 저자분께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저자분과 그녀의 가족들의 삶을, 그들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도하게 된다.

 


 “나는 내가 신부이고 도박을 끊은 강박적 도박중독자라는 사실에 신께 감사한다. 내가 도박을 할 때 일어났던 많은 일들에 대해 후회를 했지만, 그 일들도 모두 내가 회복으로 가는 여정과 어떻게 다른 강박적 도박중독자들이 도박을 끊도록 도울 수 있는가를 배워가는 과정의 일부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자를 덮고 일어나 다시 백 신부님의 영정사진 앞으로 걸어갔다. 헨리 나우웬이 말했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상처 입은 자신의 상태를 치유의 원천으로 타인에게 제공한 사람. 상처 입은 이들을 자신의 삶에 들이고, 그들이 삶의 닻을 내릴 수 있게 안전한 환대의 공간을 만들어준 사람.

- 채샘, 『오늘을 잘 살아내고 싶어』, 연지출판사, 225쪽.

 

 

 

 

by papyros 2020. 10. 19. 10:36

프레드릭 베크만, 『브릿마리 여기있다』, 다산북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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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2020년 6월, 영화 개봉 기념 다산북스 출판사 <브릿마리 여기있다> 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다산북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다산북스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보르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브릿마리는 어둠 속 의자에 앉아서 맨 처음 그 지도와 사랑에 빠진 계기가 된 빨간 점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그 점이 바로 그녀가 지도를 사랑하는 이유다. 해져서 반만 남았고 빨간색은 빛이 바랬다. 그래도 하단의 좌측과 중앙의 중간쯤에 붙어 있고, 그 옆엔 이렇게 적혀 있다. '현재 위치.'

가끔은 내 현재 위치가 어딘지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더라도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다.

 

 

  2016년 출간된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 <브릿마리 여기있다>는 그의 첫번째와 두번째 소설인 <오베라는 남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 이후, <베어타운>과 <우리와 당신들> 연작, <일생일대의 거래>와 같은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2020년 6월, 2016년에 출간된 책이 국내에서 영화로 개봉했다. (해외에서는 2019년에 이미 개봉되었다.)

 기실 <오베라는 남자> 이후 <베어타운> 사전 서평단을 먼저 참여했으며 최근 함께하고 있는 독서모임 '청춘의 책탑'에서 <우리와 당신들>을 읽어온 만큼, <오베라는 남자>의 출간 후 <베어타운>에 이르러 상당부분 문체가 정돈되고 인물서사와 시의성 면에서 다양한 메세지를 함의한  프레드릭 베크만의 최근작을 먼저 읽어온 바 있다. <브릿마리 여기있다>의 경우 이미 전자책으로 도서를 소장해 온바 있으나, 이번 사전 서평단을 통해 종이책과 전자책을 교대로 읽어오면서 완독하게 되었다.

 역자 후기에서 역자가 느낀 바로 그 감정처럼, 나 또한 책의 도입부를 일독할 때만 해도 브릿마리라는 인물에 대해 결코 좋지 못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수동공격성이나 '해야 할 일 리스트'를 꼼꼼히 작성할 정도의 강박적 성격, 결벽증을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고용센터 문이 열리자마자 직원을 힘들게 하거나 퇴근조차 시키지 않는 모습들에서 , 브릿마리를 '꼰대'와 같은 인물로 바라보고 젊은 고용센터 직원에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릿마리라는 인물의 서사가 소개되고 작품이 전개되면서 그녀에 대한 인식은 점차 변모되어갔다. 도입부에 너무 쉽게 낙인을 찍어버린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그녀가 새삼스럽게 꼭두새벽부터 고용센터에 찾아가고 그토록 직원을 귀찮게 하며 간절히 구직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그녀가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유년시절 , 그녀와는 달리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으며 사람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언니 잉그리드의 사후 부모님의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에 대해 인정받으려 부단히 애썼던 브릿마리는 어머니의 장례 이후 사무친 슬픔과 외로움으로 인해 켄트에게 기대며, 처음에는 켄트의 형인 알프와 사랑을 나누었지만, 알프와 이별하고 이후 아내와 이혼하고 브릿마리를 선택한 켄트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포기하며 집안에서 켄트의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독립시킨 이후 그녀 나이 60대 -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러 목도한 것은 '켄트의 불륜'이며, 그녀는 결국 크나큰 무망감과 상실감으로 인해 집을 나서고자 했던 것이다.

  즉 브릿마리는 일평생을 자신의 욕구나 꿈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성장시켰으며 또한 남편 '켄트'로부터 수많은 무시 (가령 브릿마리가 일을 하고자 하면 그만한 급여에 해당하는 자금을 자신이 준다며 가사일에 충실하라고 하는 등)를 감내해오며 그녀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해왔는데, 켄트의 불륜은 그러한 그녀의 노력과 책임을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브릿마리 씨, 40년 동안 일을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거기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이유가 뭐예요?"

 "나도 40년 동안 일을 했어요. 살림을 했다고요. 그래서 이제와서 거기에 목숨을 거는 거예요."


 한 때는 신경 썼다는 건 안다. 그가 그녀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랑이 언제 꽃을 피우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눈을 떠보면 꽃이 만개해 있으니까. 시들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보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발코니 식물과 상당히 비슷하다. 가끔은 과탄산소다로도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켄트의 아이들은 그녀를 좋아했던 것 같지만 아이들은 성인으로 자라고, 성인들은 브릿마리 같은 여자들을 가리켜 '잔소리꾼'이라고 한다. 가끔 같은 블록에 아이들이 있는 집이 이사 올 때가 있었다. 그 아이들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으면 브릿마리가 어쩌다 한 번씩 저녁을 차려주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엄마나 할머니가 등장하기 마련이었고, 그 아이들이 자라면 브릿마리는 '잔소리꾼'이 되었다. 켄트에게 계속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어오니 그게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여겼다. 그의 인생이 그녀의 인생이 되었다. 그녀는 그런 데 재주가 있었고 사람들은 자기가 잘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법이다. 누구라도 자기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는 법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 읽은 《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수상작인 강화길 작가님의 <음복(飮福)>이나 조남주 작가님의 <82년생 김지영> 과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브릿마리 역시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보다 '남편'이나 '자녀'들을 더 우선시하며 자신의 진정한 삶을 희생하며 살아온 한 개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르그'라는 -거의 폐허와도 같은- 작은 도시의 레크레이션센터 관리직에 취직되는 순간 , 그녀의 삶에 많은 부분이 변화되는데, 그녀가 켄트와 함께 살며 느꼈던 무망감이나 좌절, 허무함과는 달리 보르그에서는 그녀를 필요로하는 어린아이들이 존재했으며, 그곳에서 브릿마리는 오롯한 '존재 가치' 를 느끼게 된다.  자기 내면의 고유한 원리원칙과 도덕관념에 의해 행동하는 브릿마리를 혹자는 '강박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보르그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녀를 사랑한다.

 특히 브릿마리가 '새미, 베가, 오마르' 3남매에 대한 애정을 가꾸어 나가는 부분은 작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서사였는데, '사이코'와 같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며 반사회적인 청소년으로 인식되는 새미를 주변의 평가에 의해 바라보지 않고, 커트러리(테이블에 쓰이는 은기류의 총칭, 식사용 기구로서 나이프 세트(Knife Set), 포크(Fork), 스푼(Spoon)을 이름.) 를 바르게 정리하는 면모나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 새미의 사연을 듣고 그의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바로 브릿마리였다. 그녀가 비록 자신의 기준에 의해 완고하고 우회적인 표현을 잘 할 줄 모르는, 직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그녀의 내면에는 진정성이 자리해 있었다.

  도입부 고용센터 직원에게 연필을 건네는 장면에서도, 표현과 전달에 서툴지언정 그녀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진정어린 마음과 따뜻한 시선이 드러난다.



"이거 받아요." 브릿마리는 연필을 건넨다. 아가씨가 당황스러워하며 연필을 받자 연필깎이 한 쌍도 마저 건넨다. 하나는 파란색이고 하나는 분홍색이다. 그녀는 연필깎이를 턱으로 가리킨 다음 전혀 편견이 없는 태도로 아가씨의 사내 같은 헤어스타일을 턱으로 가리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두 색 다 샀어요."

 


 "당신은 편견이 없잖아요. 날 인간으로 대하잖아요. 어쩌다보니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인간. 어쩌다보니 인간을 태우게 된 휠체어로 대하지 않고." 그녀는 브릿마리의 팔을 토닥이며 덧붙인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예요, 브릿. 같은 인간이라서."


"그 사람들한테 커트러리 서랍을 보여주면 되잖아! 너도 신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하면 되잖아!"

"고맙습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러한 브릿마리의 진정성에 대해 아이들은 편견 없는 순수한 시선으로 그녀를 수용하는 것으로 답하는데, 아이들은 그녀의 부족한 면모를 채워주며 브릿마리를 서서히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파이어릿의 동성애에 대해 염려하며 배려하려는 브릿마리에 대해 그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하는 파이어릿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의 편견없고 순수한 시각이 브릿마리의 닫혀있고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씩 열여주지 않았나 싶다.

 한편 아이들과의 관계와 더불어 '켄트'의 귀환에 따라 , 남편 켄트를 따라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지, 혹은 따뜻하고 진정어린 사랑을 전해주는 경찰관 '스벤'과 새로운 사랑을 함께 키워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브릿마리의 심리묘사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스벤과의 사랑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결국 브릿마리가 그 어느집 문도 두드리지 않는 결말(켄트와도, 스벤과도 함께하지 않는 결말)이 그려진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브릿마리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년시절에는 친언니 잉그리드의 그늘 밑에서, 잉그리드의 사후에는 부모님의 기대를 위해, 결혼 이후에는 켄트와 그의 아이들을 위해, 보르그에서는 축구팀 아이들을 위해 늘 누군가를 위하는 삶만을 살아온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욕구는 뒤로해 온 삶이 바로 그녀의 삶이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강렬히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혼신을 다한 적이 없는 것이다. '아줌마는 그런 식으로 사랑해 본 게 하나도 없어요?'라는 반문은 작중 브릿마리에게도, 그리고 이를 읽는 그 너머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축구를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며 '사랑'하는 이들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한 브릿마리는, 이제 작품 도입부 무망감과 허무함에 휘감겨있는 그녀도 아니고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왔던 어린아이도 아니다.  직접 그녀가 나아갈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보르그의 아이들로부터 받은 진정한 '선물'이라 여겨진다.


"그런 식으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면서까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브릿마리는 운동복에 과탄산소다를 뿌리고 맹렬하게 문지르며 나지막이 쏘아붙인다.

베가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머뭇거린다.

"아줌마는 그런 식으로 사랑해본 게 하나도 없어요?"

 


어느 나이쯤 되면 인간의 자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브릿마리가 운전석에 오르는 동안 아이들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든다. 어른들과 달리 온몸으로 손을 흔든다. 아침이 보르그에 찾아오지만 태양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선택할 시간, 난생 처음으로 그녀를 위한 길을 선택할 시간을 주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자제하며 지평선 위에서 공손하게 기다린다. 마침내 햇살이 지붕 위로 쏟아지자 파란 문이 달린 하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녀는 멈출지 모른다. 어쩌면 다른 문을 한 번 더두드릴지 모른다.

아니면 그냥 달릴지 모른다. 알다시피 브릿마리에게는 연료가 넉넉하지 않은가.

 


 칼 구스타프 융(Carl J. Jung)의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자기(self)'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의미이자 방향성이며 최종 목적지라고 한다. 이러한  '자기실현과정' , '개성화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특히 중년기에 '자기'의 변화 국면을 맞이하며, 자기 내부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작품은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추구하는 개성화과정과도 맞닿아 있다고 여겨지는데, 브릿마리의 자기실현(개성화)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여긴다.

 한편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통한 지역공동체의 형성이나, 끈끈한 가족애의 경우는 <브릿마리 여기있다>를 발판으로 하여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에서 더욱 확대된다고 생각하는데, 때문에 이 작품은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세계를 더욱 확대하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의의가 있다고 여긴다.

<오베라는 남자>부터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 <일생일대의 거래>에 이르기까지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을 출간 순으로 읽고 다시금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브릿마리의 이후 행보는 어떠할지, 프레드릭 베크만은 다음 작품에서 또 어떤 인물을 보여줄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게 된다.

 특히 영화가 개봉된 만큼, 흥미로운 서사구조를 영화로는 어떻게 구현했는가를 비교하며 작품의 여운을 오래 지니고 싶다.

 약 470 페이지에 걸친 브릿마리의 서사를 통해 그녀의 내면에 더욱 깊이 다가가 브릿마리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 프레드릭 베크만의 작품 속에서 만나게 될 인물들 역시, 그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서사와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 있기를 소망해 본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파악하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해."

by papyros 2020. 7. 21. 23:57

 

김연정, 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네이버 E-book cafe <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매직하우스 출판사' 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김연정 작가님과 매직하우스 출판사 측에 감사드립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E.H. Carr.

 

 

 역사를 공부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접했을 에드워드 카의 문장이 있다. 도서를 읽으며, 에드워드 카의 이 유명한 문장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2016년 촛불정국 이후의 대한민국과 안중근이 살아가던 1900~1910년대 즈음을 넘나들며 서사를 전개시키기 때문이다. 2016-2017년을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 속에서 저자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즈음, 여러 강대국들에게 위협을 받는 와중에서도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조선, 대한제국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왜 특별히 안중근이었을까. 안중근에 대해 다룬 역사서나 문학작품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책의 제목은 나를 특별히 매료시켰다. 안중근과의 데이트라니, 이 책을 통해 그간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놓치고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새로운 면모를 마주하고 그에게 더 깊이 감응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소간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나갔다.

작품은 저자의 자전적인 내용(수필)이 반영된 현대사회의 서사와 허구화된 내용이 가미된 소설로서의 안중근 의사의 서사를 교차시킨다. 그러나 제목과는 달리 안중근 의사의 삶이나 일생보다도, 열강들에 둘러싸인 조선-대한제국의 국내외 정세와, 조선 사회가 타국의 종교나 문화를 수용하기까지 발생한 근본배경과 가치관에 대해 더욱 비중을 두어 지면을 할애한다. 언뜻 의아해 보일 수 있으나, 작품을 읽으며 저자가 서술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배경을 통해 안중근 의사가 추구하게 된 가치관과 종교관에 대해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내면에 깊이 와 닿은 부분 몇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우선 만국공법에 의거해 의병군 동지들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포로들을 풀어주려고 한 안중근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조선인들을 수탈하는 일본이라는 국가에 소속된 국민이기에 앞서, 개개인으로서 생명이 있고 존중받아 마땅한 한 사람으로 대우하고자 하는 노력은 일제강점기 당시뿐 아니라 당대에서도 너무나도 어렵고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독일, 일본 등 전체주의, 제국주의 국가와는 대조적으로 개개인을 중시하는 안중근의 가치관을 통해 안중근이 진정 제국주의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안중근에 대한 일화도 인상적이었는데, 국가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 권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군중들을 폭도라는 이름으로 격하시키는 일이야말로 그런 억압에 동조하고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임을 통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꿎은 민초들까지 모두 폭도라고 규정한다면 그건 분명 잘못 되었음을 나는 다시 말하고 싶다. 그때 안중근은 16세였고, 아직 어린 나이였으므로 어쩌면 어른들에게서 들은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을 폭도라고 규정한 건 안중근이 아니라 안중근에게 그런 생각을 가르친 기득권 세력이었을 것이다. 아직 열여섯살밖에 도지 않은 아이에게 쟤들은 폭도야. 그러니 잡아 죽어야 해라고 가르친 어른들의 잘못이었을 것이다. (중략) 백성이 어째서 폭도인가. 내 사정을 들어달라고 소리쳤을 뿐인데, 그런 말을 하면 폭도란 말인가. 민주주의를 내놓으라며 시위한 광주 사람들이 폭도인가. 추운 겨울에 광화문 한복판으로 뛰어나와 촛불을 들고 있는 저들이 폭도인가. 차가운 바다에 수장된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울부짖는 평범한 부모들이 과연 폭도란 말인가.

 

- 김연정, 4. 을사오적,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156.

 

 

서구열강의 야욕, 일본의 식민치하. 조국을 강탈하고 민중들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는 혼란스럽고 상황 속에서 분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 아닌가 싶다. 특히 더욱 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일수록 부끄러움을 알고 더욱 깨끗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라 한다. 맹자가 주장한 수오지심(羞惡之心)과도 같은 이치이다. 안중근 의사가 조국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고, 너무도 분개하고 비탄하여 그 어떤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과 조국에 죄를 짓는 것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그가 나라를 팔아 넘긴 을사오적과이나 친일세력들과 달리 양심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닌 가치관과 신념(특히 동양평화론, 사람에 대한 존중과 신뢰)을 믿고 사형 직전까지도 그가 지닌 사명을 다하고자 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에서 범인(凡人)과는 다른 강인함이 문장 너머로 깊이 전해져 왔다.

 

지난날에 드러난 나의 행위는 내 나라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충심에서 비롯되었소. 여러분은 부디 동양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하여 전력으로 힘써 주시길 바라오. 그런 의미로 동양평화 만세를 외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중근의 제의에 지켜보던 일본인들이 서로를 돌아보고 수근거렸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을 드러낸 중근의 태도에 그들은 난처한 얼굴이었다.

 

- 김연정, 9. 여순 감옥,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374.

 

 

 

 

 특히 작품 속에서 가장 내면을 울렸던 구절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기 직전에 올린 기도가 묘사된 부분이었다.

 비슷한 시기,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일제 식민치하에서 창씨개명까지 하며 유학을 가 시를 짓고자 하는 자신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던 윤동주 시인이나 조국 독립을 애타게 그리며 백마타고 온 초인을 기다린 이육사 시인과 달리 적극적인 방법의 조국 독립(무장투쟁의 일환)을 택했을 뿐,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 이육사 시인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모든 독립운동가 분들의 본질은 모두 같은 데에 있다고 여긴다.

 기독교 신앙을 지니고 있던 윤동주 시인이 그의 시 십자가를 통해 교회당 꼭대기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겠다고 다짐하며 희생을 숙명으로 여겼듯이, 격살 직전 안중근 의사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주여.”

깨끗하게 방을 정돈하던 중근이 문득 무릎을 꿇었다. 가슴 위로 성호를 그리는 그, 손에 쥔 묵주의 무게를 느끼며 가만히 읊조렸다.

마침내 심판의 날입니다. 조국을 걱정하는 이 마음을 부디 헤아려 주소서. 쓸모를 다하였을 때, 비로소 하느님 곁으로 나아가겠나이다.”

아멘, 눈을 뜨는 순간 중근은 빛을 보았다. 방안을 비추는 전등의 맹목적인 충성과 다른 전혀 새로운 빛이다. 하얼빈의 살인적인 추위마저 녹여버릴 그 하얀 빛을 끌어안으며 중근은 미소지었다. 마침내 오늘, 비로소 나는 내 조국의 포근한 빛이 되리라.

 

- 김연정, 7. 안중근, 마침내 쏘다,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296.

 

 

 

 

 

  양심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해나가고 있는 수많은 개인들이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세상, 윤동주 시인이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이들이 더 이상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관과는 대비되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도록 내몰리지 않는 세상. 그런 세계가 진정 그들이 소망했던 평화가 자리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소망을 품고, 그런 세계가 오기를 바라며 자신의 소명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했던 안중근 의사.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기억하며 감사하고 그 희생을 통해 반추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 희생 위에 미약하나마 지금의 평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라 여긴다.

 단지 역사소설을이라는 장르를 넘어 현재를 통해 과거의 중요한 지점을 발견하고 그 지점 속에서 중요한 발자국을 남긴 한 개인으로서의 안중근을 재조명함으로써 현대 사회에 끊임없는 노력을 촉구하고 질문을 던지는, 그리고 희망을 놓지 않는 이 책은 소설보다는 인문사회학 서적으로 분류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게 이 책은 소명의식과 가치관, 그리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사회 변화를 통해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통찰하게 하는 잔물결을 남기며 내면에 깊은 영향을 남긴 소설로 자리하게 되었다.

 

 

 아주 먼 훗날 지금보다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싸울 필요 없이 행복해졌을 때, 그간의 바람처럼 우리 국민 모두에게 마침내 평화가 도래했을 때, 두 마리의 나비가 되어 그들이 광화문 광장 어딘가에 나란히 앉아 ! 기분 좋다!’하고 소리쳤으면 좋겠다. 해피엔딩이란 원래 그런 거다. 행복한 결말을 마주하기까지 수많은 아프고 괴로운 날들을 마주하게 되어 있으며, 지금은 단지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말하고 싶다.

 

- 김연정, 9. 여순 감옥,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399.

 

 

 

 저 아이들이 살아갈 세사은 지금보다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더 이상 시위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나처럼 시위에 참여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미래의 대한민국은 제발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 김연정, 1. 그해, 겨울의 촛불.,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23.

 

 

 

 

 

 

 

 

 

 

by papyros 2018. 9. 12. 21:22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30주년 기념판

RHK, 2018. (자기계발, 에세이)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네이버 독서 카페 리뷰어스 클럽 http://cafe.naver.com/jhcomm/13279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알에이치코리아(RHK)'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RHK 측에 감사드립니다.



 

(네이버 책 정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642251)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유치원에서 배웠다. 지혜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에 있지 않았다.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었다. 내가 배운 것들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져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말라.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놓으라.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라.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으라.

변기를 사용한 뒤에는 물을 내리라.

균형 잡힌 생활을 하라. 매일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라.

매일 오후에는 낮잠을 자라.

밖에서는 차를 조심하고 옆 사람과 손을 잡고 같이 움직이라.

경이로움을 느끼라. 스티로폼컵에 든 작은 씨앗을 기억하라. 뿌리가 나고 잎이 자라지만 아무도 어떻게 그러는지, 왜 그러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씨앗과 같다.

금붕어와 햄스터와 흰쥐와 스티로폼컵 속의 작은 씨앗마저 모두 죽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림책 딕과 제인Dick&Jane, 태어나서 처음 배운 단어, 모든 단어 중 가장 의미 있는 단어인 보다Look’를 기억하라.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9.

 

 초등학생인가 중학생 즈음으로 기억하는 어느 여름날, 가족 휴가로 간 어느 콘도에서인가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10대 초반의 청소년이던 내게는 책의 제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학교가 아닌 유치원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고? 무슨 말이야.’ 언뜻 책의 제목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며 책장을 펼쳐 일독하기 시작했으나 책장을 덮을 무렵에는 행복감에 젖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조금 더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 우연히 독서 관련 카페에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접할 수 있었다. 낯설지 않은 제목. 어디선가 분명히 들어보았는데, 기분 탓일까? 싶었으나 30주년 기념판으로 재출간된 도서라는 소개 글을 읽고 10여 년 전 어느 여름의 행복감을, 20대 후반의 성인이 된 지금 다시금 마주하고 싶었고, 기쁜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유년기에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책의 제목을 비유적으로 느꼈을 때와는 달리 2018, 이미 대학원을 졸업한 20대 후반의 성인 독자인 내게 책의 제목, 그리고 저자의 경험은 비유적이라기보다 더욱 직접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배워 온 학문에 관한 깊은 지식들이 분명 원하는 분야에의 자격을 갖추고 진로를 개척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상 속에서 삶의 순간순간마다 간절히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은 저자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듯이 가치관이라는 삶의 지혜였기 때문이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의 가치관과 신념들이 드러나 있는 1: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저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실천하는 수많은 타인들에 대해 다룬 2: 내가 알고 있는 작은 천사들, 그리고 마지막 3: 나는 나의 삶을 다시 살 것이다에서는 저자가 지향하는 앞으로의 삶에 대해, 미래에 대해 제시된다. 책의 이러한 구성처럼, 이 책은 저자가 실천하고 소망하고 있는 가치가 자신과 타인에서 나아가 세상으로까지 확대되는데, 즉 한 개인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접하고 깨달은 많은 가치들을 이야기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많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목사 바텐더><도움받을 자격>이라는 에피소드였다. 개신교의 목사인 저자가 신학 대학원에 재학하던 시절 학비를 마련하고자 바텐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꾸중하긴 커녕, 오히려 사람들을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격려하는 대학 교수들의 태도. 그리고 장학금을 수령하기 위해 학비사용 계획안을 제출 하는 저자에게 즐거움을 추구하고 타인과 즐거움을 나누기 위한 예산을 계획하지 않는 학생에게 어떻게 장학금을 주느냐며 반문하는 학장의 가르침은 저자 뿐 아니라 독자인 나에게까지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 말을 잘 듣게. 자네 예산에는 즐거움을 위한 항목이 하나도 없네. , , 음악, 심지어 시원한 맥주 한 잔 할 돈조차 없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돈이 한 푼도 들어 있지 않아. 우리는 자네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은 돕지 않네.”

즐거움을 위한 항목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항목이라고!

나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은 돕지 않는다고!

세 번째 가르침이었다. 또 배웠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62-63.

 

 

 

 성공하기 위해, ‘빨리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허둥지둥 살아가는 것 보다는 마음 한켠에 여유와 행복의 자리를 비워두며 타인과 그 행복을, 즐거움을 나누는 삶이 더욱 귀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급함과 불안에 종종 잊어버리곤 하는 그 당연한 가치를 새삼 떠올릴 수 있었다.

한편 2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인어들> 이었다. 거인, 마법사, 난쟁이 중 한 캐릭터를 정해 줄을 서야 하는 놀이에서 자신은 인어인데 인어는 어디에 서야 하느냐는 어린 아이의 물음.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모두 내가 생각하고 그리는 틀 안에 넣고 분류해 이에 맞추고자 하는 획일화된 교육, 이질적인 타인을 수용하기보다는 두려워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사회현실. 최근 읽었던 표명희 작가님의 어느 날, 난민이라는 책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어떤 부분에서는 집단에 소속되지 못하고 소외될 수 있는데, 그럼에도 개개인의 개성과 다양화된 배경을 존중하기보다는 획일화된 틀 안에서 세상을 운용해 수많은 난민들을 양산시키고 있지 않는가.

 

 

 

 

 

인어는 어디에 서요?

인어는 어디에 서냐고?”

긴 침묵이 흘렀다. 아주 긴 침묵이었다.

(중략)

 여자아이는 거인이나 마법사나 난쟁이 어느 것도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만의 카테고리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인어였다. 놀이에서 빠지려고 하지도 않았고, 게임에서 진 아이들의 줄에 서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이는 인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놀이를 계속하고 싶었다. 자신의 존엄성이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는 당연히 인어가 설 자리가 있으며, 내가 그 자리를 안다고 믿었다.

글쎄……. 인어는 어디에 서야 하나? 인어들, 남과 다른 사람들, 표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 이미 만들어진 상자와 비둘기집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에 서야 하나?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학교와 나라와 세계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26-127.

 

 

 책을 모두 완독하고, 책장을 덮을 무렵 나는 이 책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를 독자들 개개인이 진정성 있는 성찰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해 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저자가 <받은 만큼 돌려주기>라는 챕터에서도 기술하고 있으며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 Pay It Forward>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언뜻 자그마하게 보일 수 있는 누군가의 선행이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순환될 수 있다는 점이 그러했다. 나의 일상을 함께하고 있는 동료나 이웃들을 차치하더라도, 나와 그 어떤 관련이 없어 보이는 타인(他人), 심지어 이방인(異邦人)으로 여겨지는 이, 약자(弱者), 심지어 인류를 넘어 타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로부터 배울 점이 있고 늘 조금씩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타인, 타 생명에 대한 사랑은 성인기에 이르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늘 배워오는 가치이지만, 곱씹어 올라가면 유년 시절부터 강조되어왔고 편견과 선입견 없이 타인과 대상을 대하던 시기가 유년기가 아니었던가.

 

메논은 그 빚을 결코 있지 않았다. 믿음이라는 선물도 15루피도 잊지 않았다. 메논이 죽기 전날에 어떤 거지가 와서 신발이 없어 발이 상처투성이니 샌들 살 돈을 달라고 구걸했다. 메논은 딸에게 지갑에서 15루피를 꺼내어 주라고 했다. 그것이 메논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한테 들었다.

(중략)

 그 사람의 아버지는 메논의 보좌관이었고, 메논에게 자선을 배웠으며, 자신의 배움을 아들에게도 물려주었다. 아들은 낯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전통을 이어나갔다. 이름 모를 어느 시크교도에서 인도 공무원에게로, 그의 보좌관에게로, 보좌관의 아들에게로, 그리고 절망에 빠진 백인 외국인인 나에게로 자비가 베풀어진 것이다. 그 선물은 큰돈이 아니었고, 나 또한 큰돈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선물은 돈의 가치를 떠나 내게 축복받았다는 느낌을 주고, 나도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81-82.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지만 서로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길모퉁이 식품점의 남자, 자동차 정비소의 수리공, 주치의, 선생님, 이웃, 동료들이 그렇다. 항상 거기에있는 좋은 사람들, 작은 일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 매일 우리를 가르쳐주고 축복해주고 용기 내게 해주고 지지해주며,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해주는 사람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을 역시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를 의지하고, 우리를 지켜보며, 우리에게서 배우고 뭔가를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 누가 그러는지 우리는 결코 모른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88.

 

 

 

 

 로버트 폴검의 이 에세이가 3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꾸준히 사랑받아 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가 추구할 만한 항존(恒存)적인 가치 타인과 생명에 대한 사랑, 늘 누군가로부터 빚지며 사는 존재라는 사실, 공정성, 삶에 대한 경이로움 등 는 거창한 소설이나 동화, 드라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과 가까운 곳의 이웃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러한 마음 따뜻하면서도 타성(惰性)을 깨뜨릴 수 있는 깊고도 날카로운 울림은 바로 우리가 직접 발견할 수 있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전해져 온다는 사실을.

로버트 풀검이 그리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 내면의 추억에 자리하는 조부인 동시에 자신이 바라는 할아버지로서의 이상향(理想鄕)이기도 한 것처럼, 소소하게 보이는 일상 속의 작은 이야기들이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는 한편 미래를 그려내게 하고 대를 걸쳐 전해줄 수 있는 가치를 품을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보다 널리, 오래 전해질 때에 한 개인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근원으로 작용하리라 믿으며,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전해 준 저자 로버트 풀검에게 마음 깊이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나 또한 세월이 흐를수록 청춘기에서 벗어나 기성세대로 나아갈 지인데, 이 책을 읽어주며 새로운 청춘들과 소통하고 내 경험을 전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할아버지 집에 간다. 할아버지와 나는 밝은 람바 사기타리 별과 겹칠 정도로 가까워진 금성과 목성, 서남쪽 하늘에서 달리는 큰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본다. 머리 바로 위에는 뿌연 안개 가튼 안드로메다 성운이 보인다. 여름이 되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은하수도 보인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할아버지는 1910년에 본 헬리혜성 이야기를 해준다. 그해 5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 할아버지는 인류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체험한 일을 목격했다. 세상은 헬리혜성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과 두려움을 느끼며 공포에 떠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할아버지는 헬리혜성이 다시 올 때 자신을 대신해서 꼭 보겠다는 약속을 하란다. 나는 약속한다.

새벽이 올 때쯤이면 머리 위 하늘을 지배하는 위대한 사냥꾼 오리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베텔게우스와 벨라트릭스, 오리온 허리 부분의 성운,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를 향해 있는 발 부분의 리겔과 사이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 인간이 참으로 오랫동안 똑같은 별들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어서 지구와 마찬가지로 저 하늘 어딘가에도 생명체가 있고, 어떻게 생겼든 간에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곳에서 보면 우리 지구도 빛날까? 우리 지구도 그곳에 사는 존재들이 상상력과 경이로움으로 만들어낸 밤하늘 별자리의 일부분일까?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어떤 것,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어떤 것의 일부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잃지 않으려면 가끔씩 나가서 하늘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잠자리에 든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2018, 195-196.

 

 

상상력은 지식보다 강하다.

신화는 역사보다 강력하다.

꿈은 사실보다 힘이 있다.

희망은 늘 경험을 이긴다.

웃음만이 슬픔을 치유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RHK, 9.

 

 

 

 

 

 

by papyros 2018. 6. 2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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