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말이야, 저 별처럼 한결같이 살고 싶어. 길 잃은 누군가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변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 말이야."
"그게 바로 선생님이네. 혜정이는 천직을 잘 찾은 것 같아."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28쪽.
최근 '빈빈책방'이라는 인문사회서적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에 대해 알게되어 출판사의 책을 찾아보다가, 최강문 작가님의 『다시, 광장』 이라는 책을 접한 뒤, 책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기실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작품은 최인훈 작가의 소설, 『광장』이었다. 책에 대한 깊은 정보 없이 제목과 역사소설이라는 간단한 설명으로 읽게 된 작품이다보니 처음에는 『광장』을 패러디한 소설이려나? 생각하며 책을 펼쳤다. (작품의 중간에도 최인훈의 『광장』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긴 한다. 뒤에서 후술토록 하겠다.)
작품은 1984년부터 1997년 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신군부의 독재가 이어지던 1984년, 대학생으로서 어두운 사회의 한복판을 살아간 당시의 20대 청년들. 84년 대학 신입생이 된 인석, 혜정, 용우, 수홍, 현태. 그들 모두는 2010년대의 20대로서 대학생활을 해 온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대학생으로서 청년기를 의미있게 보내고 싶어했고, 사회문제에 깊이있게 고민했으며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옳은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20대였다. 특히 작품의 초반부에 나는 그들 중에서도 국어교사를 목표로 하는 혜정에게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교직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있는 혜정과 같이, 나도 중학시절부터 평생 국어교사를 소망해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책을 다 읽지는 못할텐데, 어떻게하면 좋은 책을 잘 고를 수 있을까요?
혜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춘길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독서 모임을 해봐. 주기적으로 만나서 책을 읽고 토론하고. 다음 책을 무엇으로 정할지 서로 의논도 하고. 그러면 정말 도움이 될 거야."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3쪽.
친구들이 춘길 선배의 추천으로 독서모임을 만들어 책을 읽는 대목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 또한 유년시절부터 책을 즐겨읽어왔고, 대학 시절 가장 먼저 들었던 동아리가 대학 연합 독서토론동아리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1980년대의 20대들도 2010년대의 20대와 마찬가지로 대학생활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대학생으로서 지식과 생각, 가치,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 독서모임을 지속했다.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광장』 등 … 우리도 학창시절 성장 과정에서 당대 사회현실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로 수없이 공부해 온 작품들을, 작품 속 친구들 또한 사유의 폭을 넓히기 위해,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바로 보기 위해 토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필적이 닮았다? 유태인이다? 그것만으로 간첩으로 몰다니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아?"
"맞아 수홍아. 그런데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는 증거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지. 하지만 프랑스 군부는 진상을 계속 은폐하기만 했대. 법원도 군부의 편을 들어 거짓을 지키기 위해 진범 스파이를 무죄 석방하기까지 했어. 그러자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났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6쪽.
"넌 책도 다양하게 읽는구나. 교양서적하며, 소설책도 많이 있고. 최인훈의 『광장』, 나도 있는데. 이데 올로기가 뭐라고 그렇게 남과 북이 아닌 제 3국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소설 읽고 정말 마음이 아팠어. 결국에는 세상에 없는 이상향을 좇아 푸른 바다로 투신하잖아.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 율도국을 찾아 떠난 홍길동 이야기도 생각나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곳이잖아? 멀리 있을 이상향이 아니고."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39쪽.
"아, 그런 이야기도 나왔어? 비록 소설 형식이기는 하지만,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현실이었던 셈이야. 청계천 알지? 지금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는. 그곳이 60년대 말까지 난쟁이라고 표현된 노동자, 도시빈민들이 살았던 곳이었어. 70년대 초 개발 바람이 일면서 정부에서 다 쫓아냈지. 그래서 그들이 간 곳이 경기도 광주대단지, 지금의 성남시. 소설에도 나오잖아."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42쪽.
그러나 MT장소에서 함께 독서모임을 하던 중 그들을 의심하던 주인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 이 장면을 읽으며 영화 <변호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해서 북한서적 아니냐, 혹은 막스 베버를 마르크스로 착각하는 형사의 이야기... 이 시대의 20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유롭고 편안한 가운데 독서모임을 하는 것과 달리 80년대의 청년들에게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순수한 독서모임이 '운동권'이나 '간첩'으로 의심받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구들은 나름의 변화나 내적 갈등들을 겪으며 그들 삶의 경로는 각각 변하게 된다.
인석은 한국대(서울대의 소설 속 명칭) 사회학과를 다니는 명문대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온전히 던지며 운동권의 선두에 앞장서다 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종국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공장노동자로 위장취업하여 노동자들과 연대한다. 법대생인 용우는 더욱 철저히 권력을 지키고 힘을 갖고자 하는 마음에 사법시험에 매진해 검사가 되고, 혜정은 교사가 되었으나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해직되기까지 한다. 현태는 옥상에서 사고를 당한 후 장애를 지니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진실을 좇는 기자가 되었으며, 수홍은 안기부(국정원)에 입사했으나 그럼에도 친구들을 저버리지 못한다.
각기 처한 상황과 선택은 다르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각각 나름의 신념과 가치를 지니고 격동의 80년대에 대응해왔다. 자신을 내던지고 독재정권에 열정적으로 투쟁한 인석이나, 전교조에 가입하는 등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혜정과 비교하면 용우가 이기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사실 용우마저도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한 청년으로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서른을 눈앞에 둔 지금의 내가, 2010년대가 아닌 그 당대의 대학생이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자문하게 된다. 인석이나 혜정같은 용기도, 그렇다고 용우나 수홍처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선택을 하기도 두려운 나는 이 작품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들의 아이가 태어날 무렵인 90년대생의 나로서는 살아가보지 않은 80년대 청춘들이 겪은 고뇌의 깊이와 선택에 대해 감히 함부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 그저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었으며,(스무살에서 12년이 지난 후에도 30대 초반의 청년에 불과하다.) 운동권으로 학생운동을 해왔다고 해서 , 노조에 가입했다고 해서 간첩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도, 정치검사나 안기부 직원이라 하여 극우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모두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청년들은 각자 자기만의 신념과 가치로 삶을 살아내고 버텨왔을 뿐이다.
"학생운동? 막상 대학에 들어와보니, 아름다운 줄로만 알았던 세상이 전혀 아름답지 않더라구. 군사독재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가진 자는 더욱 갖게 되고, 노동자, 농민, 빈민은 더욱 굶주리는 그런 구조를 깨닫고 나서는 그냥 눈 감고, 귀 먹고 벙어리로 살 수가 없더라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지."
"세상은 바뀌지 않아."
"난 세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믿어."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 94쪽.
"오빠야가 출세해가 돈 벌면 안되나?"
"물론 그렇게 하면 나와 우리 가족은 이 가난에서 벗어나겠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당장 이 동네 이웃들은? 나 혼자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그 벽을 허물어서 다 함께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야."
"나는 오빠야가 잘됐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까지 꼭 생각해주어야 되나?"
"인옥아, 난 다른 사람들도 다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거야. 그것이 학생 운동의 목표이고, 또 민주화운동의 지향점이야."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162쪽.
"세상이 아무리 자본주의 세상이라지만, 돈과 권력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잖아요. 그 친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거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서령씨도 풍물을 하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건가요?"
"풍물을 하면서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늘 받아요. 더없이 기쁘죠. 게다가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 아닌가요? 용우씨야말로 인생의 목표가 무언지 묻고 싶네요."
- 최강문, 『다시, 광장』, 빈빈책방, 2020,191쪽.
이 소설은 정치적 신념을 넘어, 그 시대를 살아간 청년들의 고뇌와 선택을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었으며 동시에 90년대생인 내가 80년대 독재정권 시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으로 유의미했다. 교과서, 책,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80년대 독재정권 시절과 현대사회의 역사에 대해 배워왔으나 교과서의 한 줄로 접해온 것이나, 다른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청년들이기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그만큼 흥미롭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또한 청년들이 실존인물이라고 생각될 만큼 작품이 생생했으며 가독성이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책의 청년들은 바로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부모세대이자, 정치인들의 모습이리라 여긴다.
다만 결말부가 조금 아쉬웠는데, 작품의 인물소개글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뒷이야기나 자세한 고민, 반전 등이 작품 속에 담겨있지 않았다. 때문에 97년에 이어 98년부터 2020년까지를 다룬 후속 권이 나오지 않을까 추정하는데, 이 청년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과연 그들의 우정은 어떤 형태로 남게 될지 궁금증이 앞선다. 계속되는 내용이 기대되는 한편 마음에 남는 부분이 너무도 많아 오래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잘들 한번 찾아보세요.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개인 모습일 수도 있고,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겠습니까?"
- 본 게시물은 창비사전서평단의 일환으로, 창비에서 <유원> 가제본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창비 측에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성장소설. ‘성장’이란 내게 어떤것일까. 입사식 소설, 이니에이션 소설, 통과제의 소설이라고도 불리는 ‘성장소설’에는 흔히 소년/소녀나 청년 초기의 인물들이 ‘통과의례’를 거쳐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내면에 중요한 변화가 드러난다.
성장소설의 대표작이 바로 내가 중학시절부터 애착을 지닌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중 『데미안』이다. 그래서 작품을 읽어내려가다가 스쳐지나가듯 『데미안』이 언급되었을 때, 반갑기도 했으며 또한 유원에게도 『데미안』은 의미있는 작품이었구나, 아마 작가님에게도 그러했겠지?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나는 ‘성장’과 관련된 작품서사를 선호하는 편이다. 유년시절부터 20대 후반까지 애정을 지니고 있는『해리포터』 외에도,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같은 작품은 내 삶에 진정한 인생작으로 꼽을 수 있다. 백온유 작가님의 『유원』 사전서평단을 신청한 이유도 바로 이 작품이 성장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이미 서른이 된 마당에 20대의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지만, 아직도 ‘성장’의 화두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나의 내면이, 내 깊은 곳 어딘가의 아이가 자연스럽게 나를 이 책으로 이끌어 주었다.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 같은 작품과 유사하게, 『유원』의 주인공인 유원도 언뜻 평범해 보이나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제 열일곱 살인 유원이 고작 다섯 살의 어린 아이였던 12년 전, 집에 불이났을 때 언니가 유원을 구하기 위해 11층 아래로 던진 덕에 길을 지나던 한 아저씨가 유원을 구한 덕에 유원은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열일곱이던 언니‘예정’은 동생을 구하고서 본인은 결국 불길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어느덧 언니와 같은 나이의 열일곱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유원의 뒤에는 늘 그 사건이 맴돌았다.
불은 순식간에 거실로 옮겨붙었다. 오래된 소파에, 장판, 벽지에 번져 거실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찼다. 나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온 후 함께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언니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방에서 나온 언니는 이미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이 번진 거실을 보고 어쩔 줄 몰랐을 것이고 현관 쪽으로는 감히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언니는 욕실로 들어가 온몸에 물을 뿌리고 이불에 물을 부어 축축하게 적셨다. 그리고 내 방 창문을 열어 베란다 쪽으로 넘어갔다. 거실 베란다와 얇은 합판으로 분리되어 있던 내 방의 베란다까지 불이 번지고 있었다. 그때쯤 먼 곳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지나가던 이웃이 연기를 보고 신고한 것이었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자 아파트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11층을 올려다보는 게 보였을 것이다. 언니는 수건을 흔들며 구조 요청을 했다. 사람들은 검게 치솟는 연기 속에서 고개를 내민 생존자를 보고 탄식했다. 불길이 아주, 아주 가까운 곳까지 덮쳐 오고 있었을 것이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31쪽.
특히 집에 불이났던 그 사건이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유원이 성장한 이후에도 늘 유원이 12년 전 겪은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유원은 암묵적으로 ‘불쌍한 아이’이자,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유원의 삶에 ‘당위성’으로 작용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며 나는 유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과 ‘책임감’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아픔을,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슬퍼해야 한다는 논리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 맞게 또래 관계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소망과 열망을 통해 평생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며 정체성을 탐색하는 시기인데, 유원에게는 그러한 청소년기의 발달 단계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이 ‘의무’와 ‘책임’이라는 단어로 대치된다. 심지어 진로마저도 의사나 사회복지사의 길 등이 제시되는데, 타인을 돕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부과되는 것이다.
“얘. 너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너는.” 나는 얼어붙었다.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깨우친 것처럼. 나는 그 길로 도망쳤다. 할아버지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그 눈빛과 목소리가 아침에도 저녁에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꿈속에서도 맴돌았다. 할아버지는 그 말 외에 덧붙인 것도 없었다. 그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나를 옭아맸다. 그 눈빛 안에, 네가 다른 애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려고 하면 될 것 같냐는 말이 숨어 있다고 느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83쪽.
중학교 때부터 월화수목금토일 내내 학원에 갔다. 엄마 아빠가 강요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저 자기 주도 학습이 불가능한 나 같은 애는 엄격한 학원에 가야 성적이 오른다는 것을 좀 일찍 스스로 깨달은 것뿐이었다.
나는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나태하게 살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실수를 두세 번 반복해도 초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무언가에 쫓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00쪽.
이처럼 친구와의 우정속에서 행복하고 즐거워야 마땅할 청소년기에 유원에게 부과되는 의무와 책임감은 결국 유원을 고립되게 만들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예정의 오랜 친구인 ‘신아언니’인데, 기실 유원은 신아가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예정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끼며 무엇보다 유원에 대한 신아의 지나친 걱정과 과보호가 관계를 지배하다보니, 유원과 신아의 관계가 진정으로 건강한/바람직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심지어 유원은 아직까지도 사고 당시에 대한 반복적인 꿈을 꾸는 등 유년시절의 외상으로 인해 PTSD를 겪고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유원에게는 마땅히 필요한 상담이나 치료적 접근과 더불어 진정한 관계가 결여 되어있는 상태에 있었다.
이마 위로 불똥이 떨어졌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천장에서 나를 움켜쥐려는 불길이 돋아나고 있었다. 화염 너머로 참을 수 없는 비명이 지펴지고 있었다. 비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내 방에서 엄마 아빠가 잠든 방으로, 혹은 내 꿈에서 십이 년 전 나와 언니가 잠든 거실로 아무렇게나 옮겨붙는 불길을 나는 한 번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아는 꿈이었다. 나만 빼고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서야 꺼지는 꿈.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14쪽.
특히 유원의 내면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 감정은 바로 ‘죄책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유원에게는 자신을 구하고 정작 본인은 숨지고 말았던 언니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을 구하려다 다리를 다친 ‘신씨 아저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당연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왔다. 그러나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늘 무언가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신씨 아저씨의 모습이 유원에게는 불편하게 비추어진다.
죄책감의 문제는 미안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처럼 번진다는 데에 있다. 자괴감, 자책감, 우울감.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금세 타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가게 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96쪽.
작품 속에서 유원의 삶과 내면을 변화시켜주는 인물이 바로 ‘수현’인데, 수현은 학급 친구들에게 신뢰받는 친구이며 동시에 옥상 마스터키를 갖고 있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서글서글한 학생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또한 꾸준히 봉사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을 정도로 성실한 면면이 드러나는데, 수현과의 관계속에서 유원은 삶에서 최초로 ‘평범한 우정’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유원과 유원의 가족을 포함하여, 외상경험이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가 바로 이 ‘평범성’에 있을지 모른다. 너무도 평범치 않은 고통을 맞이했기에, 옆에서 건네주는 말 한 마디, 그저 함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같은 평범한 일상이 사소해 보일지라도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화로움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했다. 옥상에서 보는 노을은 아름다웠다. 너무 붉어서,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아서 넋을 잃게 만들었다. 만약 상처를 받아 취약해져 있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위로를 받거나, 혹은 이걸 봤으니 이제 그만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했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69-70쪽.
내 방에는 정말 별게 없었다. 자랑할 것이라고는 덮자마자 잠이 몰려오는 마법 같은 푹신한 극세사 이불, 정도. 수현은 많은 아이들의 방을 구경했겠지. 내 방은 평균은 될까. 그 이하일까. 다른 애들은 친구 방에서 뭘 하고 놀지. 커다란 앨범에 있는 유치원 졸업 사진 같은 걸 보면서 깔깔 웃나. 너는 이런 책을 읽고 컸구나. 우리 집에도 세계 문학 전집 있어. 너도 『데미안』 읽었니, 그러면서? 아니면 새로 나온 화장품을 꺼내 놓고 세상에 똑같은 색깔의 립은 없어. 이것저것 발라 보고, SNS에 올릴 사진을 찍거나.
나도 수현의 집을, 수현의 방을 보고 싶었다. 왠지 수현의 방에는 구경할 거리가 많을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어릴 때 사진,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이 잔뜩 있고, 서랍에는 반드시 초콜릿이나 사탕이, 책상 위는 조금 어지럽지만 수현의 흔적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캘린더에는 친구 누구의 생일, 특별한 모임 날짜들이 체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94-95쪽.
주목할 만한 점은, 수현의 서사가 드러난 이후부터인데, 수현이 사실 유원을 구한 금정동의 호인이자 용감한 시민으로 평가받는 신의석씨의 딸이라는 점은 유원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수현과 유원이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 작품 속에서 주요하게 다가온다.
전술한 바 있듯 사실 유원과는 대조적으로 학교 내에서 반장을 맡으며 학급 아이들의 신망을 받기도 하고,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등 그 어떤 구김살이나 그늘이 없어 보이는 인물인 수현에게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 자리한다는 것은 작품 후반부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기능한다. 가정을 파괴하고, 수년이 넘게 유원의 가정에 기생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 그러나 한 생명을 구하기도 했으니 사실은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 등이 교차하는 수현의 내면은 열일곱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을 것이다. 결코 통합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온 그 과정은 길고 지난했다. 그러나 수현이 결국 아버지가 ‘원래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을 수용하면서 자신은 그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유원에게 공언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데, 독립적인 한 인격으로서, 아버지와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당당한 수현의 모습은 유원의 내면에도 영향을 끼친다. 특히 Blos(1979)에 따르면 청소년기는 ‘이차적 개별화 과정 (secondary ndividuation process)’으로서, 유아기 시절 경험한 일차 분리-개별화 과정에서 나아가 부모와의 의존적 동일시에서 벗어나 심리적·정서적 독립을 이루는 데 발달 과제가 있는데, 수현은 이를 충분히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다.
“아빠가…… 해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야.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아빠의 행동에 이유를 찾아주게 되거든. 아빠도 아빠다운 아빠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서 그런 거라고, 혹은 한 번도 여유를 갖고 살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 본 게 처음이라, 은인이 되어 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식의 대접을 받아 본 것도 처음이라 거기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빠를 가련한 사람으로 만들거든.”
수현의 노력이 가상했다.
“이제 알아. 아빠는 해로운 사람이야. 아빠는 이 세상에 해로워. 너한테도, 나한테도. 아빠는 변하지 않을 거야. 포기해야 돼. 나는 아빠랑 다르게 살 거야. 너도 내 노력을 우습게 보지 마.”
수현은 아빠의 비겁함, 구질구질함, 위선, 아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빠를 아이 달래듯 달래 가며 격려하고, 다독이는 것, 아빠에게 또다시 실망하는 일련의 일들에 지쳐 있었다.
나는 수현에게 미안했다. 이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더욱 더. 문득 수현이 꾸준히 해 온 봉사활동들이 떠올랐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빠 생각은 너보다 내가 더 많이 해 봤어. 궁극적인 질문은 이거지. 그래서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럴 수 있는 걸까. 나는 왜 아빠의 다른 면은 보지 못한 걸까. 아빠는 왜 남들처럼 정직하게 살지 못하고,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아빠 속이 궁금해 나도. 얼떨결에 널 구하고 영웅이 됐지. 아빠는 그날 널 구하지 않았던 게 아빠 인생을 위해서 더 나은 일이었을 수도 있어.”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82-183쪽.
아버지와는 다른, 고유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당당히 선언한 수현의 모습을 통해 유원의 내면에도 변화의 씨앗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구해 준 댓가로 지나치게 부모님께 많은 것을 요구하는 아저씨에게 아저씨의 언행이 부담스러움을 용기있게 고백하는 한편, 신아언니와의 불건강한 관계를 직접 이야기하고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먼저 이야기하게 된다. 수현으로 인해, 유원은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이 자신을 옭아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니 예정과 유원은 다른 인격체이며, 부당한 요구에는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유원의 내부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진솔성과 용기가 유원에게도 전이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그늘이, 그 불행한 사건이 ‘내 탓’, ‘내 잘못’이 아님을, 그것은 부당하다고 외칠 수 있게 되는 데는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아주는 신뢰로운 관계 안에서, 나를 위해 나서 주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할 때 가능한 것임을 새삼 통찰하게 된다.
나는 나를 살린 우리 언니가 싫어.
나는 나를 구해 준 아저씨를 증오해.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24쪽.
“그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너…….”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95-196쪽.
“언니, 나는 율이가 좋아. 왜냐하면 내 지인 중에 우리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율이밖에 없으니까.” (중략)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지금까지 마음 놓고 언니를 좋아한 적이 없다는 뜻도 되는 거야. 나는 맨날 불안했어. 언니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아니까.”
- 백온유, 『유원』 가제본, 창비, 2020, 189쪽.
문득 세월호 유가족분들, 4.3 및 5.18 희생자의 가족분들 및 여타 사고와 국가적 문제의 희생자와 유가족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모든 분들께‘당신들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이 지점에서 ‘성장’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본다. 진정한 성장은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고 이를 직면하여,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있지 않은가 싶다. 자신의 PTSD와 관련해 지나친 죄책감을 직면한 유원은 그 죄책감으로 인한 당위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인식하였으며 이제 불필요한 고통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즉 유원이 실존주의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진실한 개인’으로서 거듭나기 시작한 바, 이제는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용기있게 자신이 선택한 삶만을 지향하며, 유원이 그 자체의 빛깔을 드러내기를 진실로 바란다.
- 본 게시물은 네이버 E-book cafe<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매직하우스 출판사' 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김연정 작가님과 매직하우스 출판사 측에 감사드립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E.H. Carr.
역사를 공부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접했을 에드워드 카의 문장이 있다. 도서를 읽으며, 에드워드 카의 이 유명한 문장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2016년 촛불정국 이후의 대한민국과 안중근이 살아가던 1900~1910년대 즈음을 넘나들며 서사를 전개시키기 때문이다. 2016-2017년을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 속에서 저자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즈음, 여러 강대국들에게 위협을 받는 와중에서도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조선, 대한제국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왜 특별히 안중근이었을까. 안중근에 대해 다룬 역사서나 문학작품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책의 제목은 나를 특별히 매료시켰다. 안중근과의 데이트라니, 이 책을 통해 그간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놓치고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새로운 면모를 마주하고 그에게 더 깊이 감응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소간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나갔다.
작품은 저자의 자전적인 내용(수필)이 반영된 현대사회의 서사와 허구화된 내용이 가미된 소설로서의 안중근 의사의 서사를 교차시킨다. 그러나 제목과는 달리 안중근 의사의 삶이나 일생보다도, 열강들에 둘러싸인 조선-대한제국의 국내외 정세와, 조선 사회가 타국의 종교나 문화를 수용하기까지 발생한 근본배경과 가치관에 대해 더욱 비중을 두어 지면을 할애한다. 언뜻 의아해 보일 수 있으나, 작품을 읽으며 저자가 서술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배경을 통해 안중근 의사가 추구하게 된 가치관과 종교관에 대해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내면에 깊이 와 닿은 부분 몇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우선 만국공법에 의거해 의병군 동지들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포로들을 풀어주려고 한 안중근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조선인들을 수탈하는 일본이라는 국가에 소속된 국민이기에 앞서, 개개인으로서 생명이 있고 존중받아 마땅한 한 사람으로 대우하고자 하는 노력은 일제강점기 당시뿐 아니라 당대에서도 너무나도 어렵고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독일, 일본 등 전체주의, 제국주의 국가와는 대조적으로 개개인을 중시하는 안중근의 가치관을 통해 안중근이 진정 제국주의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안중근에 대한 일화도 인상적이었는데, 국가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 권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군중들을 ‘폭도’라는 이름으로 격하시키는 일이야말로 그런 억압에 동조하고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임을 통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꿎은 민초들까지 모두 폭도라고 규정한다면 그건 분명 잘못 되었음을 나는 다시 말하고 싶다. 그때 안중근은 16세였고, 아직 어린 나이였으므로 어쩌면 어른들에게서 들은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그들을 폭도라고 규정한 건 안중근이 아니라 안중근에게 그런 생각을 가르친 기득권 세력이었을 것이다. 아직 열여섯살밖에 도지 않은 아이에게 ‘쟤들은 폭도야. 그러니 잡아 죽어야 해’라고 가르친 어른들의 잘못이었을 것이다. (중략) 백성이 어째서 폭도인가. 내 사정을 들어달라고 소리쳤을 뿐인데, 그런 말을 하면 폭도란 말인가. 민주주의를 내놓으라며 시위한 광주 사람들이 폭도인가. 추운 겨울에 광화문 한복판으로 뛰어나와 촛불을 들고 있는 저들이 폭도인가. 차가운 바다에 수장된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울부짖는 평범한 부모들이 과연 폭도란 말인가.
- 김연정, 「4. 을사오적」,『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156쪽.
서구열강의 야욕, 일본의 식민치하. 조국을 강탈하고 민중들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는 혼란스럽고 상황 속에서 분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 아닌가 싶다. 특히 더욱 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일수록 부끄러움을 알고 더욱 깨끗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라 한다. 맹자가 주장한 수오지심(羞惡之心)과도 같은 이치이다. 안중근 의사가 조국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고, 너무도 분개하고 비탄하여 그 어떤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과 조국에 죄를 짓는 것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그가 나라를 팔아 넘긴 을사오적과이나 친일세력들과 달리 양심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닌 가치관과 신념(특히 동양평화론, 사람에 대한 존중과 신뢰)을 믿고 사형 직전까지도 그가 지닌 사명을 다하고자 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에서 범인(凡人)과는 다른 강인함이 문장 너머로 깊이 전해져 왔다.
“지난날에 드러난 나의 행위는 내 나라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충심에서 비롯되었소. 여러분은 부디 동양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하여 전력으로 힘써 주시길 바라오. 그런 의미로 동양평화 만세를 외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중근의 제의에 지켜보던 일본인들이 서로를 돌아보고 수근거렸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을 드러낸 중근의 태도에 그들은 난처한 얼굴이었다.
- 김연정, 「9. 여순 감옥」,『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374쪽.
특히 작품 속에서 가장 내면을 울렸던 구절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기 직전에 올린 기도가 묘사된 부분이었다.
비슷한 시기, 문학(시)이라는 장르를 통해 일제 식민치하에서 창씨개명까지 하며 유학을 가 시를 짓고자 하는 자신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던 윤동주 시인이나 조국 독립을 애타게 그리며 ‘백마타고 온 초인’을 기다린 이육사 시인과 달리 적극적인 방법의 조국 독립(무장투쟁의 일환)을 택했을 뿐,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 이육사 시인 …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모든 독립운동가 분들의 본질은 모두 같은 데에 있다고 여긴다.
기독교 신앙을 지니고 있던 윤동주 시인이 그의 시 「십자가」를 통해 ‘교회당 꼭대기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겠다’고 다짐하며 희생을 숙명으로 여겼듯이, 격살 직전 안중근 의사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주여….”
깨끗하게 방을 정돈하던 중근이 문득 무릎을 꿇었다. 가슴 위로 성호를 그리는 그, 손에 쥔 묵주의 무게를 느끼며 가만히 읊조렸다.
“마침내 심판의 날입니다. 조국을 걱정하는 이 마음을 부디 헤아려 주소서. 쓸모를 다하였을 때, 비로소 하느님 곁으로 나아가겠나이다.”
아멘, 눈을 뜨는 순간 중근은 빛을 보았다. 방안을 비추는 전등의 맹목적인 충성과 다른 전혀 새로운 빛이다. 하얼빈의 살인적인 추위마저 녹여버릴 그 하얀 빛을 끌어안으며 중근은 미소지었다. 마침내 오늘, 비로소 나는 내 조국의 포근한 빛이 되리라.
- 김연정, 「7. 안중근, 마침내 쏘다」,『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296쪽.
양심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해나가고 있는 수많은 개인들이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세상, 윤동주 시인이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이들이 더 이상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관과는 대비되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도록 내몰리지 않는 세상. 그런 세계가 진정 그들이 소망했던 평화가 자리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소망을 품고, 그런 세계가 오기를 바라며 자신의 소명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했던 안중근 의사.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기억하며 감사하고 그 희생을 통해 반추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 희생 위에 미약하나마 지금의 평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라 여긴다.
단지 역사소설을이라는 장르를 넘어 현재를 통해 과거의 중요한 지점을 발견하고 그 지점 속에서 중요한 발자국을 남긴 한 개인으로서의 안중근을 재조명함으로써 현대 사회에 끊임없는 ‘노력’을 촉구하고 ‘질문’을 던지는, 그리고 희망을 놓지 않는 이 책은 소설보다는 인문사회학 서적으로 분류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게 이 책은 소명의식과 가치관, 그리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사회 변화를 통해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통찰하게 하는 잔물결을 남기며 내면에 깊은 영향을 남긴 소설로 자리하게 되었다.
아주 먼 훗날 지금보다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싸울 필요 없이 행복해졌을 때, 그간의 바람처럼 우리 국민 모두에게 마침내 평화가 도래했을 때, 두 마리의 나비가 되어 그들이 광화문 광장 어딘가에 나란히 앉아 ‘야! 기분 좋다!’하고 소리쳤으면 좋겠다.해피엔딩이란 원래 그런 거다. 행복한 결말을 마주하기까지 수많은 아프고 괴로운 날들을 마주하게 되어 있으며, 지금은 단지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말하고 싶다.
- 김연정, 「9. 여순 감옥」,『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399쪽.
저 아이들이 살아갈 세사은 지금보다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더 이상 시위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나처럼 시위에 참여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미래의 대한민국은 제발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 김연정, 「1. 그해, 겨울의 촛불.」,『안중근과 데이트하러 떠난 길 위에서』, 매직하우스, 2018, 23쪽.
- 이제월,『만일 해리포터가 삶을 바꿀 수 있다면』, 항해출판사, 2017, 230-231쪽.
내가 해리포터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이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책을 무척 좋아하는 꼬마아이였다. 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어머니께서 건네 준 책 표지에는 별로 호감이 가게 생기지 않은, 안경을 쓰고 빗자루를 탄,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삽화로 그려져 있었다. 더군다나 작품의 내용도 다소 어렵게 느껴져 책장에 그대로 비치해 둔 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절친한 친구가 그 책을 무척 재밌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다시 펴 보았다. 그 때가 바로 나는 마법의 세계로, 해리의 이야기로 첫 여행을 떠난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꼭 18년 후,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나는 해리와 오랜 세월 여정을 함께하며 성장했고, 이미 시리즈가 완결 난 지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와, 해리의 삼총사와 함께하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이 롤링이 『죽음의 성물』헌사의 마지막 부분에 기재한 바로 그 독자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 내게, 저자의 신작인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이목을 끄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저자는 본격적으로 작품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전, 먼저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를 제공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덕분에 해리포터 시리즈의 가장 첫 장에 등장하는 롤링의 헌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제목 및 시리즈의 각 챕터에 등장하는 소제목을 통해 어떤 내용을 기대할 수 있는지, 작품의 전체 그림을 조망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이어서 저자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부터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 이르기까지 해리포터 시리즈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치/의미에 대해 독자들에게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듯 서술한다.
저자의 여러 메시지 중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해리가 ‘찬 인물’이 아니라 ‘빈 인물’이었다는 점이다.해리가 당초부터 ‘찬 인물’이었다면 그는 완벽한 사람이었을 터이고, 전지전능한 영웅적 존재에 대해 이야기가 전개되었을지 모르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사춘기를 보내고(불사조기사단과 혼혈왕자에서 특히), 감정을 조절하기보다는 가짜 용기를 무모하게 내세우다가 가장 사랑하는 인물(시리우스 블랙)에 대한 ‘상실’을 경험하기도 한 그가 ‘빈 인물’이었기에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나 알버스 덤블도어와 같이 타인/타 생명체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보이며 자신을 지키면서도 희생할 줄 아는 인물들이 해리가 빈 부분을 채워 성장의 계단을 밟아가는 데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불사조 기사단』에서 해리가 시리우스가 잡혀간 꿈을 꾸고 미스터리 부서에 서둘러 가고자 하는 해리에게 이성적으로 현실을 바라볼 것을 조언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해리가 그리몰드 광장에 들를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등 조력하며 ‘우정과 신의’를 지킨 헤르미온느 그레인저의 참된 인격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론과 헤르미온느, 덤블도어는 해리의 주변 인물이지만 이미 해리이거나 장차 해리 자신이어야 하는 인물들입니다.즉 미래의 해리가 가질 덕목을 이미 가진 인물들입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파괴적 비극으로 끝난다면, 끝내 주인공은 그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이룩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변 인물들은 결코 주인공 곁에 머물지 못할 겁니다.
반면 이 이야기가 비극이 아니라, 극복과 해결을 향한 이야기라면, 그 여정 중에 어떤 비극의 징조가 보이더라도 이들은 해리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결국 해리를 해리답게 만드는 데 일조할 것입니다.
- 이제월,『만일 해리포터가 삶을 바꿀 수 있다면』, 항해출판사, 2017, 147-148쪽.
해리포터 연작은 해리를 빈 인물로 그려냄으로써, 그가 가장 상세하게 묘사되는 때조차 어떤 흐릿함을 남겨둡니다. 해리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아이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누구나 자기를 해리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작품에서 해리는 적잖이 묘사되며, 그의 성격이며 행동 방식, 습관, 외양 등이 기술되지만, 이런 겉모습이 해리가 어떤 아이라고 정확하게 지시하지는 않습니다.
- 이제월,『만일 해리포터가 삶을 바꿀 수 있다면』, 항해출판사, 2017, 134-135쪽.
해리포터 연작은 처음부터 문제를 해결하고 고비를 넘길 때마다, 친구들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매번 가장 화려한 마지막 무대는 주인공이 장식하지만, 그 무대를 만드는 것은 해리의 적이거나 친구들이고, 주인공을 무대에 올려놓는 것도 언제나 그들이었습니다. 해리 포터는 대단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스스로 겸손을 유지합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사건을 직접 공유한 친구들에게 으스댈 수 있을까요?
- 이제월,『만일 해리포터가 삶을 바꿀 수 있다면』, 항해출판사, 2017, 136쪽.
작품의 등장 인물들은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신뢰를 보이고 자기 속내를 내비칩니다. 감정이나 기억처럼 밖으로 드러나고 훔쳐볼 수 있는 것 말고,오직 자신의 전체로서 꺼내놓을 수 있는 ‘생각’을 직접 나눔으로써 이들은 한 사람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한 사람에게 신뢰받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합니다.그리고 이 우정과 신뢰가 불신과 적의로 뭉친 사슬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비록 사슬과 사슬의 접점은 한 점 혹은 두 점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연결되어 퍼져나간 우정과 신뢰는 충분히 강한 것입니다.
해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중하고 감정을 조절하며 자신을 통제하는 헤르미온느의 노력이나, 같은 정도로 묘사도지는 않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거나 번복하지 않는 론과 지니, 루나, 네빌 들의 한결같은 노력이 이 사슬을 완성합니다.
- 이제월,『만일 해리포터가 삶을 바꿀 수 있다면』, 항해출판사, 2017, 186-187쪽.
그러나 이처럼 나약함을 보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빈 인물’인 해리는 결국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소명을 완수한다. 제임스포터와 릴리 포터의 희생을 통해, 그리고 알버스 덤블동와 스네이프의 사랑을 통해 전해진 타인에 대한 사랑과 그를 실현하기 위한 ‘희생’. 그가 마지막 순간에 볼드모트가 자멸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은 그가 특별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적인 마법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기꺼이 ‘의로운 행동을 믿고, 선택하는 인물’이였기 때문이다.
일컨대 고전소설 중 영웅소설 『소대성전』에서 소대성이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미천한 신분을 지니고, 이를 극복하며 성장하는 영웅서사로 그려진 것처럼, 해리의 서사도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 될 수 있으리라 여긴다.
해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응원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해리를 사랑하는 진실된 이유를 이 작품을 통해서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뛰어난 인물, 처음부터 꽉 찬 인물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을 통해 천천히 변화해 나가며 ‘채워진’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해리가 나(를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와 달리 처음부터 완벽한 인물이었다면 그에게 이처럼 공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말로 위대하고 완전무결한 마법사로 여겨지는 알버스 덤블도어조차 과거 어둠의 마법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으며, 리무스 루핀은 마루더즈의 양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임스와 시리우스의 장난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해리포터, 그리고 해리를 둘러싼 대부분의 인물들이 나약하고 실수를 범하기도 하다가 점차 자신의 덕목들을 채워나가며 성장, 변화해나가는 인물들이었기에 해리포터와 해리의 주변 인물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제임스포터와 릴리포터, 알버스 덤블도어와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사랑이 해리에게 이어지고, 그 사랑이 다시 제임스 시리우스 포터와 알버스 세베루스 포터에게로 이어지듯이 20대 중후반이 된 나에게도 그 사랑이 이어지고 있음을 체득한다. 그것은 – 위험한 시기를 겪는 마법사들이 순수혈통을 유지하는 데 힘을 쏟기 보다는 머글, 혼혈, 그리고 도깨비와 집요정까지 포용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 사회 주변에서 소외되어 있는, 배제되어 있는 수많은 약자들과 진정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대와 유대, 사랑과 신뢰, 소통’ 등의 가치는 시대와 환경을 막론하고 수많은 고전에 등장하는데, - 레미제라블, 몰개월의 새, 삼포가는 길 등 - 해리포터가 분명히 좋은 소설임을 반증하는 주요한 가치라 여긴다. 해리포터는 분명히 삶을, 세계를 바꿀 수 있는(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작품임이 틀림없었다.
더욱이 개인적으로, 유년시절부터 해리포터 커뮤니티에서 활동해오며 만나온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함께 작품을 향유할 뿐 아니라 다른 참여적 활동에까지 나아가고 있는데(독서모임 등), 이것이야말로, 즉 우정과 신뢰로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함께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그 힘이야말로 해리포터라는 작품이 내 삶에 전해준 귀한 선물이라 믿는다.
이것이 바로 수십 번, 수백 번이 넘도록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다시 해리포터 시리즈를 정주행할 만큼 , 아직도 해리포터의 세계를 여행하는 이유이다.(PotterHead)
여러분이 누군가의 진가를 알아보려면 잘게 쪼개서 성급하게 보지 말고, 그들을 오래도록 길게 엮어서 보아야 합니다. 마치 ‘펜시브’에서 생각을 정리하듯, 낱낱의 기억은 또렷하게 하되 이들 하나하나에 휘둘리지 말고 전체 줄거리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그 사람은 그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가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이제월,『만일 해리포터가 삶을 바꿀 수 있다면』, 항해출판사, 2017, 144쪽.
덤블도어는 해리가 마법 모자에서 그리핀도르의 검을 뽑아든 것을 상기시키며, 그것은 진정한 그리핀도르만이 뽑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어서‘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해리는 5학년이 되어서도 아직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덤블도어는 다시 강조합니다.“재능이 아니라 행동이 너를 결정한다”라고요. 이런 관점은 해리포터 연작을 내내 관통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을 가장 분명하게 확신하는 인물은 덤블도어 교장과 헤르미온느 그레인저입니다.
- 이제월,『만일 해리포터가 삶을 바꿀 수 있다면』, 항해출판사, 2017, 177-178쪽.
해리 포터는 밑바닥부터 점차 능력을 키우면서 자꾸 한계에 부딪쳐서 울고불고 난리지만, 그 와중에도 점차 한 사람의 어엿한 어른이자 ‘나다운 나’로 자라납니다. 그는 누군가의 기대나 우려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합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합니다.처음에 우리는 그가 새로운 마법을 배우고 멋지고 힘든 모험을 완수해내서 그에게 끌리는 줄로 알았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을 흔든 건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가 내린 결정들이었습니다. 그는 흔들리며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 이제월,『만일 해리포터가 삶을 바꿀 수 있다면』, 항해출판사, 2017, 245-246쪽.
해리포터 연작은 삶과 세상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 것’이라고 줄기차게 이야기합니다.또 우리가 ‘위대한 사랑’의 신비 아래서 살아가야 한다고, 우정과 신뢰로 강하게 결속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이고, 그렇게 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인 것이지요. 해리 포터는 한 사람의 서사로 보편을 이야기합니다. 정말 고전의 방식입니다.
- 본 게시물은네이버 카페 '북카페 책과 콩나무'서평 이벤트활동의 일환으로, 황금부엉이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내가 예전과 다르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저를 빵가게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것처럼 저도 찰리의 자리를 빼앗고 못 들어오게 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찰리 고든이 존재하던 시간은 과거이지만, 그 과거가 현실이라는 거예요. 오래된 건물을 허물어야 그곳에 건물을 새로 지어 올릴 수 있는데, 과거의 찰리는 지울 수가 없어요. 찰리는 지금도 존재해요. 처음에 저는 찰리를 찾고 있었어요. 찰리의 – 나의 – 아버지를 보러 갔죠. 찰리가 과거에 한 인간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저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저 자신의 존재도 정당화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니머 교수가 저를 창조했다고 말했을 때, 저는 모욕감을 느꼈어요. 그런데 찰리가 과거에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제 안에, 제 주위에 말이에요. (후략)”
- 4부 이변,「제발 인격을 존중해줘요」, 299쪽.
우리 모두는 현재를,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 여기’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에서 역설하는 것처럼, 무거운 돌을 열심히 굴려 산을 오르던 과거의 ‘나’와 정상에 오른 현재의 ‘나’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분절적인 관념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한 사람을 바라볼 때 과연 그 과거를 논하지 않고 그의 삶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지적장애인이었던 찰리 고든이 똑똑해지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지능이 높아지는 수술을 받은 전후 3월부터 11월까지 변화의 과정 속에 자신이 경험하며 느낀 것을 기록한 경과보고서(일기)의 형식을 취하며 독자 자신이 찰리의 경험과 삶, 감정을 통해 이와 같은 질문에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이 작품을 꼭 11년 만에 다시 만났다. 2006년 중학 3학년 시절, 1학년 때부터 존경하며 따르던 은사님(국어 선생님)의 소개로 찰리 고든을 접하게 되었고 그 때 구입한 ‘동서문화사’ 판본을 아직도 소장중이다. 그때와는 다른 출판사, 다른 역자에 표지도 아름답게 디자인되어 작품이 재출간 되었다는 사실에 기뻤고, 무엇보다 내 마음 한 가운데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리하고 있던 ‘찰리 고든’을 다시 만난다는 사실에 무척 설레며 책장을 넘겼다. 작품 초반부를 읽으며 독자인 나 자신이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성장하고 변화했다는 사실을 분병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1년 전 작품을 읽을 때 로샤검사(로흐샤흐 검사)와 주제통각검사(TAT) 검사 등 투사검사가 등장하는 것도 몰랐던 중학생이 ,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국어국문-국어교육과 더불어)한 후 청소년상담사 자격을 취득하여, 소설 속에 다양한 심리 검사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반갑고도 놀라워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자그마한 성장과 변화, 10년 사이에 이루어진 지식의 확대와 넓어진 이해에도 놀랍기만 한데 그 모든 것을 단지 9개월 만에 경험한 찰리는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싶다. 특히 초반부 경과보고서에서 맞춤법이 맞지 않고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수술 후 폭발적으로 변화하여 180이 넘는 지능을 갖추고 몇 개국어를 하며 번역되지 않은 논문을 읽기도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지능을 따라가지 못하며 혼란을 느끼는 모습들에서 찰리의 혼란이 s 분명히 전해진다. ‘똑똑해지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지녔기에 찰리 고든은 비크맨대학교 심리학 실험실의 실험에 참여하게 되어 지능을 높이는 수술을 받게 된다. 분명 스트라우스 박사님이나 니머 교수님, 그리고 심지어는 찰리가 따르던 ‘지적장애성인센터’에서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을 담당하는 키니언 선생님까지도 찰리의 이러한 ‘동기’와 열망을 ‘다른 지적장애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좋은 것’이라면서 칭찬한다. 그러나 찰리가 깨달았듯이, 자신의 장애를 부정하던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로, 빵집의 여러 사람들과 진정한 친구로서 ‘인정’받기 위하여 그러한 강렬한 동기가 자리했기 때문에 그의 그런 강렬한 열망이 참으로 아프게 여겨졌다. 기실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인정’받고 싶고 기대에 ‘부응’하고픈 욕구는 누구나 어느정도 지니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심리 정서적 문제인데 –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결코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그렇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 인정받고 수용되는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감정을 나눌 이들이 주변에 자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찰리는 온전히 인정받고 수용된 경험도, 또 진실되이 자신의 문제를 나눌 수 있는 이도(적어도 수술 전에는-) 없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처절히 노력해왔어야만 했으며 그 스스로가 자신의 장애를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고쳐야만 하는 것’, ‘없어져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해왔다. 한 사람이라도 주위 누군가가 찰리가 장애를 겪고 있어도, 똑똑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다면, 내면을 어루만져주는 ‘상담자’의 역할을 하는 이가 주변에 있었다면, 과연 찰리가 그토록 강렬한 열망을 지닌 채 스스로 실험에 자원했을까.
똑똑해지고 싶다는 흔치 않은 욕구를 강하게 지닌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누구든지 무척 놀라워하는데, 그런 욕구가 어디서 생겨났는지를 이제는 나도 알 것 같다. 로즈 고든은 평생을 그것에 매달려 살았다. 찰리가 저능아라는 사실에서 공포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로즈의 잘못인가? 아니면 매트의 잘못인가? 이런 물음들이 따라다녔다. 노마를 낳은 뒤에야 로즈는 자신도 정상적인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장애아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는 나를 바꾸려는 노력도 그만두었다.그렇지만 정작 나는 엄마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엄마가 바랐던 똑똑한 아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그만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 3부 고독, 「배울수록 이상한 점」, 218-219쪽.
그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가게에 앉아서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한 아이구나” 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나는 인정받기를 원했고, 오래전에 내가 신발 끈을 묶고 스웨터의 단추를 채우는 법을 익혔을 때, 만족스러워하던 그의 얼굴에 떠오르던 환한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 표정을 보고 싶어서 여기에 왔지만, 끝내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 3부 고독, 「혹시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277쪽.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자신이나 가족들보다 겉으로 비친 모습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매트는 몇 번이고,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라고 말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노마는 옷을 잘 입어야 했고, 집에는 좋은 가구를 두어야 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점을 알지 못하도록 찰리는 집 안에 있어야 했다.
- 5부 회귀, 「우리는 누군가가 필요했어」, 382쪽.
그러나 그 열망을 이루어 지능이 높아져 천재가 되어 세상과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과 인지능력이 생기자, 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역차별’이다. 지능이 높아져 친구들과 대화하고 어울리고 싶었던 찰리에게 과거의 조롱에 비견할 ‘비난’과 ‘소외’가 찾아온다. 왜 그런 수술을 받아 자연을 거스르는지 지적하며 천재가 된 찰리가 자신들에게는 부담스럽다는 것을, 이질적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즉 지능이 매우 뛰어나든, 혹은 지능이 매우 낮든 정규분포표의 양 극단(양 끝)에 있는 ‘특별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면서 ‘소외’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패니가 말했다. “찰리, 네가 뭔가 아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야. 네가 변한 방식 말이야! 나도 모르겠어. 예전에 넌 착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 아주 똑똑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평범하고 솔직했어. 그런데 갑자기 똑똑해지려고 네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 다들 그렇게 얘기해. 그건 옳지 않다고 말이야.”
“하지만 더 똑똑해지고, 지식을 얻고,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기를 원하는 게 도대체 뭐가 잘못이야?”
- 2부 혼돈,「어둠속의 소년」, 164쪽.
“그럼 제가 어떤 모습이기를 바랐던 거죠? 제가 여전히 순종하는 강아지처럼 지내면서 꼬리를 흔들고 나를 걷어차는 발을 핥기를 바라는 거예요? 분명히 이 모든 것은 나를 바꿔놓았고 내가 나 자신을 생각하는 방식도 바꿔놓았죠. 더 이상 사람들이 내게 건네준 쓰레기를 받아먹을 필요가 없다고요.” “사람들이 찰리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하진 않았어요.”
“선생님이 뭘 알아요? 잘 들어요. 그중에서 가장 나은 사람들도 잘난체하면서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생색을 냈죠. 자신들이 우월해 보이면서 부족한 점을 감출 수 있도록 저를 써먹으면서 말이죠. 누구든지 바보 곁에 있으면 자신이 똑똑한 것처럼 느껴지죠.”
-3부 고독, 「나는 왜 벌을 받고 싶었던 걸까?」, 188-189쪽.
더욱이 비크맨대학교의 심리학 교수로서 찰리의 실험을 주도한 니머 교수는 수술 전의 찰리 고든을 ‘부정’하곤 한다. 수술 후 찰리가 사람이 되었으며 ‘새로 태어났다.’고 표현한다. 그는 ‘지적장애인’ 시절 찰리의 인격, 찰리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지능이 낮은 지적장애인인 찰리 고든은 세상과 타인, 그리고 자신의 삶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부재했기에, 자신과 같은 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으나 지능이 생긴 후 세상에 대한 인지능력이 갖춰졌으니 이제사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니머 교수가 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비록 ‘니머 교수’라는 한 개인이 작품에서 문제가 되었으나 찰리에 대한 니머 교수의 시선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비단 찰리를 포함한 지적장애인 뿐 아니라, 청각장애인,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등 장애인 분들, 이방인(외국인) 등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인권감수성을 지니고 소수자와 약자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는가? 청소년상담사 연수 때 네팔 이주배경 여성 ‘찬드라 꾸마리’씨가 겪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주노동자인 그녀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잠시 인근마을에 외출을 갔는데, 지갑을 두고 나오는 바람에 식사 후 값을 지불하지 못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한국인과 너무 닮았다는 점에만 포착해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정신병원에 감금해, 그녀는 그 곳에서 6년을 보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주변의 수많은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해 단지 그들이 우리와는 다르고(이질적이고), 우리와 같은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미 우리 내부에서 그들에 대한 가치관을 낙인찍은 후 우리가 행동양식이나 가치관 면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힘겹게 내려는 목소리를 억누른 것이 아닌지, 일방적으로 보호하고 통제하려고 하며 정작 그들이 필요로 하는, 소망하는 것에는 ‘경청’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과리노 박사에 대한 재미난 사실. 그가 내게 했던 것에 대해. 로즈와 매트를 속인 것에 대해 나는 마땅히 그에게 화를 내야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첫날 이후로 그는 항상 나를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항상 어깨를 토닥여주고, 미소를 지어주고, 용기를 주는 말을 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접할 기회가 드물었던 것이다. 과리노 박사는 그때 나를 한 인간으로 대했던 것이다. 배은망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내가 화가 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나를 실험동물로 취급하는 태도이다. 니머 교수는 자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계속해서 언급하거나 언젠가 앞으로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진짜 인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니머 교수가 나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그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지적장애인을 보며 웃을 때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은 인간의 감정이 개입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머 교수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내가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3부 고독, 「배울수록 이상한 점」, 219쪽.
그때, 니머 교수가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크맨 대학교에서 이 프로젝트를 수행한 우리들은 우리의 신기술로 자연이 낳은 오류를 우수한 인간으로 창조해낸 사실을 알게 되어서 만족스럽습니다. 찰리가 우리에게 왔을 때 그는 사회에서 벗어나 있었고, 돌봐줄 친구나 친척도 없이 대도시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으며,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정신적 능력도 없었습니다. 과거도 기억하지 못했고, 현재와도 동떨어져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습니다. 실험하기 전에는 찰리 고든이라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자기들의 개인금고에 넣어둔 새로운 귀중품처럼 취급할 때 왜 그토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확신하건대, 우리가 시카고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맴돌며 메아리치던 바로 그 생가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든 사람들에게 니머 교수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나도 사람이에요, 사람. 부모도 있고, 지난 일도 기억하고, 과거도 있어요. 그리고 당신들이 저 수술실로 옮기기 전부터 난 존재했다고요!”
- 3부 고독,「나만의 공간」, 241-242쪽.
"자넨 말도 안 되는 비난을 하고 있군. 늘 그랬지만, 우리가 항상 잘 대해주었다는 건 자네도 알잖아?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모든 걸 하셨지만, 저를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하진 않으셨죠. 제가 실험에 참여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당신은 몇 번이나 큰소리를 쳤죠.네, 저도 압니다. 그렇게 말하면 당신이 날 만들었다는 뜻이 될 테고, 주인님에 창조주까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매순간마다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시는군요. 교수님이 믿든 안 믿든, 저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위해 한 일이 – 아무리 근사한 것이더라도 – 저를 실험실 동물처럼 다룰 권리는 없습니다. 지금 제가 한 인간이듯이 실험실에 걸어 들어오기 전부터 찰리도 한 인간이었죠. 충격을 받으셨나 보군요! 네, 제가 사람이 아닌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갑자기 알게 되었군요. 훨씬 전부터 사람이었죠. 그런데 이런 진실을 아이큐가 100을 넘지 않는 사람은 생각할 가치조차 없다는 교수님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겁니다. 니머 교수님, 저를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찔리실 겁니다.”
- 4부, 이변,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364-365쪽.
‘인권감수성’, 개개인이 타인의 감정과 정서에, 타인치 처한 환경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으려면 그 개인의 성격이나 기질보다도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뒷받침 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이 1959년에 출간된 것을 고려했을 때, 아마 저자는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학문중심 교육과정이 등장하면서 학문과 이성, 지능을 우선시하면서, 심리학 실험에서도 개개인의 인권을 도외시하는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9년의 미국 사회와 그리 다르지 않은 길을 2017년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학교 성적이 뛰어난 우등생이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밝혀지는 상황은 여전히 성적, 결과를 지향하며 ‘인권감수성’, ‘공감능력’에 대한 교육 더욱 진전하지 못하고 답보하고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대변한다. 또한 장애인에 대한 혐오(비하)하는 단어들이 사용되어 오고 있으며 특정성별이나 소수자, 약자에 대한 혐오발화 등이 인터넷 상에서 수없이 양산되고 있다는 것도 인권감수성 부재의 심각한 문제라 여겨진다. 특히 세월 호 사건 당시 유족들을 비하했던, 혹은 아직도 그 얘기냐고 하던 사람들과 같이 타인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은 것은 이를 환기하게 한다. 특히 세월호로 인해 가족을 잃은 초등생에 대해 같은 반 친구들이 조롱했다는 기사는 정서적, 심리적인 지원과 교육이 가장 강조되어야 할 유년시절 공감교육, 가치관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진정한 공감/가치관 교육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전공서로 이론을 배우며 머릿속을 ‘이론적 지식’이라는 내용물 만으로 채워가는 것이 아니며,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경험적으로 실천’하고, 직접 그들과 만나 대화하며 찾아가는 등 ‘소통과 교류’라는 내용물로 채울 때 가능한 것이라 여긴다. 가장 낮은 곳이라 여겨지는 – 성매매 여성들에게도 찾아가 위로와 격려, 공감적 한 마디를 건넨 김수환 추기경님이나 수단의 톤즈 아이들의 교육과 의료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치신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분들이 이러한 분들이시며, 작품의 후반부에 찰리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찾아간 워렌 주립보호소의 윈슬로우와 같은 이를 주목할 만하다.
"돈과 물질적인 것을 지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시간을 내서 애정을 주는 사람은 아주 드물죠.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죠."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고, 그는 방을 가로질러 선반 위에 놓인 빈 아기 우윳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병이 보이시죠?" 우리가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궁금했다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다 자란 남자를 두 팔로 안고, 저 병으로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그리고 환자들이 누는 오줌과 똥을 뒤집어 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말이죠? 제 말에 놀라신 것 같군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저 고상하고 높다란 상아탑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 환자들처럼 모든 인간의 경험에서 차단되어 떨어져있는 것에 대해서 당신이 도대체 뭘 알죠?" 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고, 내 웃음을 오해했는지 그는 갑자기 대화를 끝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여기에 돌아와 머물게 되면, 그리고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를 듣게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해할 것이다. 그는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 4부 이변,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38-339쪽.
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도- 심지어 찰리와 같은 지적장애인 분들 또한 스스로 자신의 지능이 다른 사람들보다 낮음을 인지하신다고 한다. - 자신만의 개성과 가치관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의 주인공 ‘오웬 서스킨드’ 씨 또한 자폐성 장애를 지니고 있으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세상에 이야기를 하고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계시며 그 가치관과 철학으로 아름다운 삶을 꾸려가며 성장해 나가고 계신 분이다. 나와 다른 이들 – 장애인, 외국인, 성 소수자 등 –의 존엄성과 인격, 고유한 능력과 개성을 존중할 수 있는 ‘공감능력’은 지능과 더불어 가장 고귀한 능력임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 자신과 같은 수술을 받아 ‘실험실’에서 인간의 손에 고통 받고 있는 생쥐 앨저넌의 상황과 행동을 이해하고, 그의 무덤에 ‘꽃을’ 놓아달라는 그 아름다운 부탁을 전하는 찰리를, 그 어느 누가 지능이 떨어진다 하여 무시할 수 있을까.
앨저넌은 멋진 쥐이다. 털은 솜처럼 부드럽다. 눈을 깜빡이는대 눈을 뜨면 눈동자는 검정색이고 둘레가 분홍색이다. 앨저넌에게 먹이를 줘도 좃냐고 난 버트에게 물어따. 왜냐하면 그를 이겨서 난 기분이 좋지 아나꼬 상냥하게 대하고 친구가 되고 시퍼끼 때문이다. 버트는 안 된다고 해따. 앨저넌은 나처럼 수술을 바든 무척 특별한 쥐라고 해따. 앨저넌은 노픈 지능을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한 최초의 동물이라고 버트가 말해꼬, 아주 똑똑해서 밥을 먹으러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앨저넌이 들어갈 때마다 바뀌기 때문에 앨저넌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해따. 버트의 말을 드꼬 난 슬펐는대 앨저넌이 뭔가를 배우지 모타면 먹을 수 없어서 배고플 거시기 때문이다.시험을 통과해야만 먹을 수 있는 건 올치 안타고 생가칸다. 버트라면 입장을 바꿔서 뭔가를 머글 때마다 시험을 치고 시플까. 난 앨저넌과 친구가 될 생각이다.
- 1부 꿈, 「의식과 잠재의식」, 54-55쪽.
추신. 혹시 기해가 있으면 뒷마당에 있는 앨저넌의 무덤에 꼿을 좀 놓아주세요
- 5부 회귀, 「혹시 기해가 있으면」, 453쪽.
교육학과 문학, 심리학을 공부하는 내게 다시금 귀한 의미로 10년 만에 다시 만난 이 작품은 내면을 감응시켰다. ‘공감할 수 있는’ 고귀한 마음을 지녔기에 가장 아름다운 청년, 찰리 고든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자신의 전공분야인 심리학을 문학에 형상화시킨 저자 대니얼 키스의 다른 작품들 – 특히 『빌리 밀리건』- 또한 기대가 된다.
“하지만 지능 하나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당신들의 대학에서는 지능과 교육과 지식을 모두 숭배하죠. 하지만 당신들이 모두 놓친 한 가지 사실을 이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능과 교육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위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께, 단단하게 박혀 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라든지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부애서 자극이 오면 아몬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자극의 성질에 따라 당신은 공포를 자각하거나 기분 나쁨을 느끼고, 좋고 싫은 감정을 느끼는 거다. 그런데 내 아몬드는 어딘가 고장 난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 손원평, 『아몬드』, 29쪽.
이 작품에는 편도체-아미그달라의 이상으로 감정-특히 공포나 불안, 두려움 등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조금 특별한 17세 소년 윤재(선윤재)의 성장과정이 그려져 있다. 유년 시절 눈앞에서 한 아이의 죽음을 보고도,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 윤재의 열일곱 생일날 한 남자의 무차별 살인으로 인해 갑작스레 닥친 할멈(할머니)의 죽음과 칼에 찔리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도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윤재를, 사람들은 마치 이상한 ‘괴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으로 대한다.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으로 인해 학교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윤재의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윤재가 ‘정상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감정과 감정의 반응에 대해 교육시켜왔다.
‘- 복잡한 것까진 몰라도, 기본은 꼭 알아야 해. 그렇게만 해도 조금 메말랐다는 소릴 들을지언정 정상범주에 속할 거야.
사실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미세한 단어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따위는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 손원평, 『아몬드』, 38쪽.
- 엄마도 네가 이렇게 지내는 걸 원하시지는 않았을 거다.
- 엄만 제가정상적으로 살길 원하셨어요 – 그게 무슨 뜻인지 가끔 헷갈리긴 하지만.
- 바꾸어 말하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 평범…….
내가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들과 같은 것. 굴곡 없이흔한 것.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평범하게 졸업해서 운이 좋으면 대학에도 가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을 얻고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런 것. 튀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한 것.
-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 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이루기 가장 어려운 가치란다.
- 손원평, 『아몬드』, 89-90쪽.
한편 곤이(윤이수) 또한 윤재와 같이 사람들에게서 ‘괴물’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곤이는 유년 시절 놀이동산에서 부모님과 헤어져 이후 보호시설에서 지내다 입양 후 다시 파양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여러번 사고를 쳐 소년원에 들락거리는 삶을 살아가 부모님을 다시 만난다. 걸핏하면 폭력을 휘드르고, 교사들의 수업 진행을 방해하거나 잦은 욕설을 사용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는 곤이는 소위 ‘문제아’로 불리며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윤재는 비록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지 못할지언정 그 누구보다도 타인과 소통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독서량이 풍부해 지식이 많을뿐더러 성장과정에서 할멈과 엄마로부터 받은 충만한 ‘사랑’을 늘 추억하고 있다.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 손원평, 『아몬드』, 171-172쪽.
곤이 또한 그가 정말 천성이 ‘나쁜’아이라서, 폭력을 행사하고 반항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을 찾지 못한 후 곤이는 여러 번 거처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파양당하며 버려진 경험이 있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부모님을 찾았지만 친어머니의 임종도 떳떳하게 보지 못했고 , 아버지는 자신과 소통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버려지고,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내적 자아를 지니고 있는 곤이는 다시 고통 받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버려지지 않기 위해 강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다만 그 ‘강함’을 어른들이 규정해 둔 세계에 반항하고 질서를 위반하는 ‘과시적 욕구’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곤이가 신뢰할 만한 어른들에게, 혹은 학교/청소년상담사와 상담을 받으며 ‘유기되는 것에 대한 불안’, ‘이해와 소통의 욕구’를 해소한다면 곤이의 문제행동 또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에게 ‘고통’이라는 감정에 공감하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나비의 날개를 찢으면서까지 윤재와 소통하고자 하는 장면을 통해 곤이의 진실성과 순수성 또한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윤재의 내면을 이해하며 곤이를 ‘좋은 아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윤재뿐이다. 바로 그 때문에 곤이는 윤재와 단 둘이 있을 때만은 다른 누구에게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깊이 터놓을 수 있었다.
- 그 남자는 말이야…….
곤이가 말했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내가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애들과 어울렸는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일로 절망했는지……. 그 사람이 날 만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게 뭔 줄 알아? 강남에 있는 학교에 날 처넣은 거였어. 거기 가면 내가 모범적으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라도 갈 줄 알았나봐. 근데 첫날 가보니까 나 같은 놈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물인거야. 날 보는 눈빛 하나하나에 그렇게 써있더라고. 그래서 깽판을 좀 쳐 줬지. 거긴 얄짤 없더라. 하루 만에 쫓겨났어.
곤이가 콧바람을 불었다.
간신히 전학시킨 게 여기야. 그나마 인문계라 체면은 섰겠지. 그 사람은 내 인생에 시멘트를 쫙 들이붓고 그 위에 자기가 설계한 새 건물을 지을 생각만 해. 난 그런 애가 아닌데…….
- 손원평, 『아몬드』, 166-167쪽.
불과 몇 달 전의 기억이 아련하게 머릿속을 오갔다. 나비의 날개를 찢던 날, 곤이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다가 실패한 그날, 어스름이 내리던 무렵, 바닥에 짓이겨진 나비의 잔해를 닦아 내며 곤이는 몹시 울었다.
- 아무런 두려움도 아픔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싶어.
눈물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조금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다.
-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기엔 넌 너무 감정이 풍부하거든. 넌 차라리 화가나 음악가가 되는 편이 더 어울릴걸.
곤이가 웃었다. 물기 어린 웃음을.
- 손원평, 『아몬드』, 248쪽.
윤재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과 곤이의 마음 깊은 곳 진실한 내면을 바라보면서, 한 개인이 지닌 외적인 부분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해 그 내면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성급히 낙인찍는 ‘편견’을 경계해야 한다는 중요한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특히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음에도 타인의 고통, 타인이 위험에 처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나서서 돕기보다 외면하고 회피하는 범인凡人들과 달리 윤재는 곤이가 위험에 마주했을 때 진심을 전하고 곤이를 구해내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해 직접 위험과 대면하는 용기를 보인다.
즉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편도체의 크기’와 같은 장애나 질환, 혹은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계로 인해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삶의 방향’을 어디에 두고 실천하느냐의 문제에 달려있음을 되새기게 된다.
세월호 유가족이나 실직(해고)된 노동자 등 사회 문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 아픔에 공감한다는 문제도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공감하는 마음을 그저 마음에만 품고 있지 않고 실천적 행동으로 옮기는 것. 나 또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행인 중 한명이 아니었던가 싶은 마음에 부끄러워진다.
내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처음엔 할멈을 찌른 남자의 마음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점차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척하는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중략)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면 엄마와 할멈을 뻔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사람들은? 그들은 눈앞에서 그것을 목도했다. 멀리 있는 불행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거리였다. 당시 성가대원 중 한 사람이 했던 인터뷰가 뇌리에 떠다녔다. 남자의기세가 너무나 격렬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다고.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 손원평, 『아몬드』, 244-245쪽.
윤재는 엄마와 할머니가 칼에 찔린 그 사건 뒤로 심박사에게 삶의 조언을 얻고, 곤이와 소통하며 진실한 ‘우정’을 배우고 고통과 두려움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통찰했으며 도라(이도라)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깨달을 뿐 아니라, 특별한 존재가 된 도라에게는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내밀한 마음을 고백한다.
불을 끄고 책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겐 풍경처럼 익숙한 냄새였다. 그런데 거기 무언가 다른 게 실려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탁, 하고 작은 불씨가 켜졌다. 행간을 알고 싶었다. 작가들이 써 놓은 글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누군가가 가게로 들어왔다. 도라였다.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말하고 싶었다. 마음에 떠오른 불씨가 꺼지기 전에.
- 나 언젠간 글을 쓸 수 있을까. 나에 대해서.
- 도라의 눈망을이 뺨을 간질였다.
- 나도 이해 못하는 나를, 남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 이해.
- 손원평, 『아몬드』, 206-207쪽.
즉 기존의 세계에서 가족을 상실한 후 새로운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결과적으로 윤재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어머니도 기적적으로 회복되며 마무리된다. 편도체의 문제로 감정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평가하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나 의사들의 확정적 진단을 넘어서 윤재의 소통하고 이해하며 진심을 다하고자 하는 ‘내면’의 노력이 결국 뇌(편도체)의 문제를 극복해낸 것이다.
그렇지만 말이야, 사람의 머리란 생각보다 묘한 놈이거든. 그리고 난 여전히,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쩌면 넌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란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박사가 웃었다.
-자란다는 건, 변한다는 뜻인가요.
- 아마도 그렇겠지. 나쁜 방향으로든 좋은 방향으로든.
나는 곤이와 도라와 함께 보낸 지난 몇 개월을 짧게 회상했다. 그리고 곤이가 후자로 자라고 변하기를 바랐다. 그 전에 ‘좋은 방향’이 어떤 것인지부터 고민해야겠지만.
- 손원평, 『아몬드』, 252-253쪽.
책장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너무나 마음을 울리는 문구들이 많았던 이 소설은 인간관계를 통해 사랑, 우정, 고통과 두려움, 불안 등 감정들을 다룰 뿐 아니라 진정한 공감이란 실천적 행동의 수반에 있음을, 그리고 삶의 ‘좋은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이 찾은 추구하는 가치의 방향을 위해 노력해 나갈 때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좋은 방향’을 고민하며 그저 달리는 개개인 모두의 삶이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이 소설을 소용돌이치는 감정에 고민하고 아파하는 청소년들, 새로운 관계를 마주하며 청소년기에 마주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변화와 성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청년들, 외적인 문제행동만으로 학습자(청소년)들을 쉽게 낙인찍으려하는 일부 교사들을 비롯해 선입견을 지니고 타인을 바라보는 어른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이들……. 그들 모두와 함께 읽고 소통하며 성장해나가고 싶다. 삶을 살아가며 그 삶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히는 만큼, 자신이 느끼는 것 그대로 행동하는 만큼 어느 새 한 발짝 나아가 있을 것이다.
‘누워있는 동안 같은 꿈을 자주 꿨다. 운동회가 한창인 운동장이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태양 아래 나와 곤이가 서 있다. 무척 뜨겁다. 앞에서 달리기 시합이 펼쳐지고 있다. 곤이가 씩 웃으며 내 손에 뭔가를 쥐여 준다. 손을 펼치자, 반투명한 구슬이 손바닥 위를 또르르 구른다. 중간에 웃는 표정 같은 둥근 선이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구슬을 굴리자 붉은 선이 방향을 바꾸며 울었다 웃었다 한다. 자두 맛 사탕이다. 사탕을 입안에 넣는다. 달콤하고 새콤하다. 침이 고인다. 혀로 사탕을 굴린다. 이따금씩 사탕이 이빨과 부딪혀 딱딱 소리를 낸다. 갑자기 혀가 저릿하다. 짭짜름하고 시큰하다. 비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그 사이로 다디단 향이 올라와 나는 정신없이 코를 킁킁댄다.
탕, 어디선가 출발 신호가 공기를 울린다. 우리는 지면을 밀어내며 달리기 시작한다. 시합이아니라, 그저 달리기다. 우린 그냥 몸이 공기를 가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 손원평, 『아몬드』, 249-250쪽.
여기서부터는 아주 다른 얘기다. 새롭고, 알 수 없는.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 따윈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일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