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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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은 2019년 '민음사' 첫 번째 독자 (5월) : 민음북클럽 서평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양서를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민음사와 민음북클럽 담당자님께 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관련링크 : http://minumsa.com/event/31735/)



 

 『보라색 히비스커스』. 2019년 5월 민음북클럽 첫 번째 독자 프로그램으로 올라온 선정 도서들 중 가장 아름다운 제목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던 고등학생 캄빌리가 드넓은 세계와 분명한 자아를 찾아 나서는 정신적 성장기' 라는 이벤트 페이지 소개문구에 이끌렸다. 청소년들을 가르치려는 교사가 되기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2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성장'이란 화두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에 유독 청소년을 다룬 성장소설, 교양소설, 입사소설 등의 서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라색 히비스커스』 라는 책을 '첫번째 독자' 프로그램에서 읽고 싶은 도서로 지망해 신청링크를 제출한 다음, 별다른 안내문자나 연락이 없어 잊고 있던 찰나 ...... 한 달이 넘게 흐른 6월 말, 집으로 책 한 권이 배송왔다.

 그제서야 '첫번째 독자' 프로그램에 당첨된 사실을 확인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숨가삐 2019년의 반년을 보낸 ㄴ내게 주어진 민음사의 선물 같아서 책을 펴며 행복했다. 이 아름다운 책의 제목에는 과연 어떤 내용과 의미가 담겨있을 까.

 프로그램 신청 당시 이벤트 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던 문구처럼, 작품의 내용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교육 하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자녀들에 정서에 주목한다.  주인공 캄빌리와 그녀의 오빠 자자는 나이지리아 지역 사회에서 굉장한 부를 갖추고 독재정부에 대항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유진'의 자녀이다.  유진은 유년 시절 선교사들을 따라가 신학교의 교육을 통해 성장한 가톨릭 신자인데, 그의 종교에 대한 집착과 과도한 신봉은 모태신앙으로 가톨릭 신앙을 갖고 태어나 성당에 다니고 있는 내가 보기에도 굉장히 불편할 정도였다. 작품을 읽으며 '유진'의 언행이 등장할 때마다 '이건 아니다'라는 불편한 감정이 마음 속 깊이 올라왔다.  가톨릭 신앙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과 자비, 자애를 중점에 두는 신앙인 데 반해 캄빌리와 자자의 아버지 '유진'은 가톨릭 종교를 마치 집안에서 자신의 가부장적 권력을 더욱 공고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종교의 교리를 지키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진은 목적과 수단을 전도시키고 있었다. 식전기도를 지나치게 길게 해 가족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생리통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해 불가피하게 씨리얼을 먹은 캄빌리가 미사 전 공복재를 지키지 않았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 (* 실제로 공복재는 미사 1시간 전이 아닌, 영성체를 하기 전으로부터 1시간 전 음식을먹지 않는 규정인데 작품 속 유진은 그것을 미사 1시간 전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오인인지, 지나친 신앙이 나은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 이교도인 아버지(할아버지)를 모시지 않고 심지어 함께하는 것도 꺼려하며 억지로 개종시키려는 모습, 할아버지의 그림을 지니고 있던 딸에 대한 한 폭력,  아들 자자의 유년시절 첫영성체 교리문답에 1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망가뜨린  일화 등..... 유진 자신의 입장에서는 신앙을 지키려는 자랑스러운 행동일지 몰라도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곧 폭력일 뿐이었다. 심지어 가톨릭 신자로서 종교적 관점에서도 사랑이신 주님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지시키는 폭력을 저질렀을 뿐더러   (사랑의 하느님이 아닌 처벌자로서의 하느님만을 알아야만 했던 가족들.) 선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리지 않고 그의 부친이 가톨릭 신앙을 믿지 않고 나이지리아 전통을 따른다고 하여 이교도로 간주하여 냉소적으로 대하며 효의 예를 다하지 않기까지 했다.

 가톨릭 신학교를 뛰쳐나갔던  헤르만 헤세가 받은 교육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유진의 자녀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우리가 앞으로 열여섯 가지 구 일 기도를 암송할 거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용서를 빌기 위해서. 그리고 일요일, 첫 번째 기도일이었던 삼위일체 주일에 우리는 미사 후에 남아서 구일 기도를 시작했다. 베네딕트 신부가 우리에게 성수를 뿌려 줬다. 일부가 내 입술에 떨어져서 기도할 때 텁텁한 짠맛을 느꼈다. 아버지는 오빠나 내가 성 다대오를 향한 열세번째 간구에서 졸기 시작한다고 느낄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용서받아야 하는지를.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50-51쪽.

 

 


 "오빠가 왜 이페디오라랑 사이가 안 좋았는 줄 알아요?" 또다시 들리는 이페오마 고모의 속삭임은 아까보다 더 사납고 시끄러웠다. "이페디오라가 오빠 면전에 대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 때문이에요. 이페디오라는 진실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죠. 하지만 오빠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진실에 대해서는 꼭 싸우려 들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죽어 가고 있어요, 알겠어요? 죽어 간다고요. 노인네가 사실 날이 얼마나 남았겠어요, 그보? 그런데 오빠는 아버지를 이 집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드리러 가지도 않죠, 오조카! 오빠는 하느님 행세를 그만둬야 해요. 하느님은 다 큰 어른이니까 당신 일은 당신이 하실 수 있어요. 아버지가 조상님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벌하실 거라면 오빠가 아니라 하느님이 벌하시게 놔두란 말이에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24쪽.

 

 


 아버지는 우리가 모두 자리에 앉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기도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조금 길게, 이십 분을 넘긴 후에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로 마무리 짓자 이페오마 고모가 혼자 튀도록 목소리를 높여서 "아멘."이라고 말했다. "밥 식으라고 일부러 그런 거야, 오빠?" 고모가 투덜거렸다. 아버지는 못 들은 척 냅킨 펴는 동작을 계속했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25쪽.

 

 

 종교적인 내용 뿐 아니라 학업 면에서도 유진은 그의 자녀들에게 엄격했다. 집서는 물론이고 이페오마 고모가 거하는 은수카에 처음 놀러갈 때 조차도 빽빽한 일과표가 주어졌을 뿐 아니라 자녀들은 '1등'이 아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가 자녀들에게 학업 등 모든 면에서의 완벽을 강요하는 모습은 올해 초 방영되었던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  이나 영조의 '사도세자' 에 대한 양육을 쉽게 연상시킨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해야만 했던 나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는데 너는 왜 모든 환경이 주어져 있는데 하지 못하냐는 자신과의 비교, 자신의 과거환경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유진이 지닌 출생과 가족환경에 대한 콤플렉스가 느껴졌으며 강박적 집착 또한 드러났다. 사랑과 칭찬, 존중 없는  채찍질, 과도하고 비뚤린 부모의 욕망과 열등감이 자녀를 힘들게 할 뿐이라는 것을,  유진의 언행과 캄빌리의 표현을 통해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빠와 내게, 다른 애들이 1등하는 걸 볼고 성심여학교와 성 니콜라오 학교에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자주 말하곤 햇다. 아버지의 학업에 돈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도 - 특히 그의 불신자 아버지, 우리 파파은누쿠는 말할 것도 없고 - 아버지는 늘 1등을 했다.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고, 아버지만큼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나를 꼭 끌어안고, 많은 것을 받은 자에게는 많은 기대가 따르기 마련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내 안의 뭔가를 따뜻하게 만드는 표정으로 내게 미소 짓는 것을 봐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54쪽.

 

 


"거울을 봐." 나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봤다. "거울을 보라니까." 거울을 받아서 들여다봤다. "네 머리가 몇 개냐, 그보?" 아버지가 처음으로 이보어를 섞어서 물었다. "하나요." "저 애도 머리가 하나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아버지." 가벼운 먼지 이쿠쿠가 스프링이 풀리듯 갈색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불어왔다. 입술에 앉은 모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너는 내가 왜 그렇게 너랑 오빠한테 최고만 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다고 생각하니?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느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다. 하느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나한테는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주는 아버지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나무와 돌을 신으로 섬기며 세월을 보냈지. 선교단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난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나는 이 년 동안 교구 사제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래 심부름꾼. 학교에 데려다주는 사람은 없었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13킬로를 걸어서 니모에 갔지. 성 그레고리오 중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여러 사제들의 정원사였고 말이야."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63-64쪽.

 

 

 그러나 캄빌리와 오빠 자자가 함께 이페오마 고모 댁인 은수카에 머무르는 경험을 한 이후 그들은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일방적인 폭력 하에서 성장해 온 세계가 이상하며 비정상적인 세계라는 것을 느끼고 변화, 성장하게 된다. 단적으로 주어진 일과표 대로 기도하고 공부해오는 행위 외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등의 집안 일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캄빌리가 처음으로 아마카를 통해 집안일을 배워나가는 모습, 감정표현이 없는 자신이 비정상적이라는 아마카의 말을 곱씹는 모습, 파파은누쿠(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나누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싶다는 욕망.... 집에서 그들이 아버지의 폭력과 억압 하에 '죽어있었다'면, 은수카에서는 그들은 '살아있는 존재'였고 더욱이 그 나이대 청소년들이 충분히 지닐 수 있는 욕망(아마카의 음악을 함께 듣는 것, 신부님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을 지니는 '청소년 다운 청소년'일 수 있었다. 특히 이페오마 고모의 가정이 얼마나 자녀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개성을 인정하는지가 아마카의 직설적인 표현들에서 잘 드러났다. 처음 사촌인 캄빌리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며 경계하는 모습들도 그러했고 견진성사 직전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비판할 수 있는 아마카의 용기가 캄빌리와 자자의 성장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작품의 서두 자자의 언행이 매우 의미있는 지점이라고 여긴다. 기실 작품의 서두를 읽을 때만 해도 가톨릭 신자인 나는 성체를 모독하는 자자의 언행에 충격을 받았다. 굉장히 버릇없는 사춘기 청소년이네! 라며 혀를 휘두를 정도로.

 그러나 작품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들의 성장과정과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서두에 등장했던 - 그 일이 일어나기 며칠 전 자자의 행동이 너무도 당연히, 해야만 했던 행동이고 진정으로 용기있는 변화의 시도였다고 여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그 폭력의 굴레에서 자자와 캄빌리, 그리고 어머니 모두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부장적인, 구습적인, 폭력적인 , 잘못된 권위에 의문을 던지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어야, 비판적 사고와 표현이 용인되어야 진정으로 건강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다. 은수카에서 그들이 비로소 접한 이페오마 고모의 가정처럼.

 

  유진은 분명 나이지리아 정부에 대해서는 <써라운드>라는 신문을 간행하면서 지하운동을 펼쳐갈 정도로 독재정부의 부정함과 부당함을 비판하는 용기있는 자이다. 작품에도 , 등장했을 정도로 아버지의 장례식에 어쨌든 비용을 부담했으며 싫은 소리를 조금 했을지언정 여동생 이페오마의 생활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의 가정에서는 폭력적으로 군림하는 독재자였으니 이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신앙을 실천하는 방법을 잘못 배웠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그의 열등감이 가족들에게 군림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을까..

  어느 쪽이든 그가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는, 부당한 폭력임을 자인하는 순간,  그는  그의 삶 전체를 잃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 작품 후반부 그가 파파은누쿠(할아버지) 그림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웅크리는 그의 딸 캄빌리를 향해 발길질을 하고 벨트를 휘두르며 엄청난 폭력을 저지른 것 이후, 그리고 그가 자자의 행동에 크게 화내지 못한 것이 바로 그 또한 그 점을 무의식 중에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아내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으리라 여긴다.

 


 

"자자, 너 영성체 안 했지." 아버지가 조용히, 질문에 가까운 투로 말했다. 그러자 오빠가 식탁 위의 미사 경본에게 말하듯 그것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 웨이퍼 먹으면 입내 나서요."

 나는 오빠를 빤히 쳐다봤다. 어디 나사라도 빠졌나? 아버지는 평소에 그것을 꼭 성체라 부르라고 했다. '성체'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몸이 가진 본질과 성스러움에 근접하기 때문이었다. '웨이퍼'는 너무 세속적이었다. 웨이퍼는 아버지의 공장들 중 하나에서 생산하는 것 - 초콜릿 웨이퍼, 바나나 웨이퍼 - 이자 사람들이 비스킷보다 좋은 걸 자식에게 주고 싶을 때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부님이 자꾸 제 입을 만져서 구역질 나요." 오빠가 말했다. 내가 자길 쳐다보고 있음을, 충격받은 내 눈이 입 다물라고 애원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내 쪽은 보지 않았다.

 "그건 주님의 몸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다. 아주 낮았다. 하얀 고름이 찬 두드러기가 구석구석 퍼진 아버지의 어굴은 아까부터 부어 보였지만 점점 더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주님의 몸을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받지 않을 순 없다. 그건 곧 죽음이야, 너도 알잖니."

 "그럼 죽을게요." 오빠는 두려움 때문에 눈동자가 콜타르색으로 변했으면서도 이제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럼 죽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높은 천장에서 뭔가가 떨어졌다는 증거, 절대로 떨어지리라 생각지 않았던 뭔가가 떨어졌다는 증거를 찾듯 식당을 휙 둘러봤다. 그러고는 미사 경본을 집어 그것이 식당을 가로지르게끔 오빠를 향해 던졌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5-16쪽.

 


"그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마카가 엄마 말을 못 들은 양 아마디 신부에게 말했다.

"교회의 주장은 서양식 이름이 있어야만 견진 성사가 유효하다는 거잖아요. '치아마카'는 하느님이 아름다우시다는 뜻이에요. '치마'는 하느님이 제일 잘 아신다는 뜻이고요. '치에부카'는 하느님이 가장 훌륭하시다는 뜻이죠. 이 이름들이 '바오로'나 '베드로'나 '시몬'만큼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나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326쪽.

 

  한편  3년 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출간한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이번 작품에서  사회속에 만연히 자리하고 있는 성 불평등(차별적 요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비록 나는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 이슈에 대해 깊이있게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저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으며 더욱이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물론 해당 내용들은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 많이 사라진 내용이긴 하지만 작품 속에 드러난, 그리고 우리도 수십년 전까지는 분명 존재했던 여성에 대한 성 불평등의 내용이 군데군데 엿보였다. 여성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식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모습들, '여성은 치마를 입고 남성은 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편견, 그리고 성당 안에서 여성 만이 미사보를 필수로 써야 한다는 인식들... 이런 사회 속 만연히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인식을, 일상 속의 의문을 해결해 나갈 때 성 차별의 문제가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세상을 바꾼 변호인> 이라는 실화 바탕의 영화를 관람한 바 있다.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얼마 안되는 여성 변호인 긴즈버그가 성에 대한 불평등한 법률에 의문을 지니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그려진다.

  여러 진통들이 많긴 하지만, 한국사회도 남녀를 막론하고 불평등한 것들에 모든 합리적인 개인들이 비합리적인 사소한 것들에 대해 자그마한 의문을 가지는 데서 시작하기를 바란다.

이미 변화되기 시작했지만 소소한 예시들로는, '왜 가사노동과 육아는 여성의 것들인가?' '왜 결혼 시에 남성이 집을 장만해 와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가?' 등을 들 수 있겠다.

 페미니즘이라는 거창한 이론을 내세우고 싶지 않다. (나도 아직 많이 부족하고...) 다만 우리가 모두 어느 순간에는 약자, 소수자에 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권감수성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다.

 

 


 "누가 누굴 돌보게 될지는 모르죠. 1학년 토론 수업의 여학생 여섯 명이 결혼했는데 주말마다 남편들이 벤츠나 렉서스를 타고 와서 오디오랑 교과서랑 냉장고를 사 줘요. 학생들이 졸업하면 걔들도, 걔들 학위도 남편 소유가 되죠. 모르겠어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99쪽.

 


"은나, 아니." 이페오마 고모가 말했다. "선교사들 탓이 아니에요. 저는 미션스쿨 안 나왔나요?"

"너는 여자잖아. 여자는 자식이 아니야."

"에? 자식이 아니라고요? 오빠가 언제 아버지 다리 아프시냐고 물어본 적 있어요? 제가 자식이 아니면 앞으로는 아침에 잘 일어나셨냐고 안 물어볼게요."

파파은누쿠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내가 조상님 곁에 있게 됐을 때 내 영혼이 너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힐 거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109쪽.


 성 베드로 예배당에는 성 아녜스 성당에 있는 것 같은 커다란 촛대나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제단도 없었고,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가능한 한 많이 묶게끔 두건을 묶지도 않았다. 봉헌 행렬을 위해 나올 때 보니 어떤 여자들은 속이 비치는 검은 베일을 머리에 쓰기만 했고 어떤 여자들은 바지를, 심지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봤다면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여자가 하느님의 집에서 머리카락을 보이면 안 되지. 여자가 남자 옷을 입으면 안 되지, 특히 하느님의 집에서는! 아버지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291쪽.

 

 서평을 마무리하며 ...  왜 이 작품의 제목이 '보라색 히비스커스' 인지를 다시금 고찰해본다. 이페오마 고모의 집 마당에서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보기 전까지, 캄빌리와 자자에게 '히비스커스'라는 꽃은 '빨강색'이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162쪽) 그러나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존재는 새로운 관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전에는 보도 듣도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아이들은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자가 히비스커스 꽃을 그들의 집 앞마당에 심으며 이를 소중히 가꾸는 것은 결국 그들이 인식하고 수용하게 된 새로운 세계를 그들의 집에서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소망이 아니었을까. 은수카에서 비로소 살아있을 수 있었던 그들의 세계를, 그들의 집에서도 지니고 싶다는 그 소망...   

 그런 점에서 자자의 저항과 어머니의 결단은 그들이 진정으로 희귀하고 향기로운 히비스커스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변화와 성장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선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여긴다.

많이 아픈 만큼 희귀하고 향기로운 책이라 여러 번 재독하고 음미하고 싶은, 다채로운 색의 소설이었다.

(책 후반의 번역가 해설을 통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 아님을 알게 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27쪽.

 

 

 "일단 오빠를 은수카에 데려갔다가 이페오마 고모를 만나러 미국에 가는 거예요." 내가 마한다. "아바에 돌아가면 오렌지나무도 새로 심고, 오빠가 보라색 히비스커스도 심고, 저는 익소라꽃을 심어서 나중에 꿀을 빨아 먹을 거예요." 나는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내가 팔을 뻗어 어머니 어깨에 두르자 어머니도 내게 몸을 기대며 미소 짓는다.

머리 위에 염색한 목화솜 같은 구름이 낮게 떠 있다. 너무 낮아서 손을 뻗으면 물기를 짜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곧 새로운 비가 내릴 것이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보라색 히비스커스』, 민음사, 2019, 364-365쪽.

 

by papyros 2019. 7. 5. 16:24

[과제3] 제 7회 밑줄긋고 생각잇기

 세 번째 밑줄

조남주, 『사하맨션』,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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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사하맨션과 영화 기생충을 함께 다루고 있으니 영화 스포에 주의 바랍니다. (스포 多)

 

 

 

 이번 3주차에는 조남주 작가님의 『사하맨션』 중에서 「201호, 이아」, 「714호, 수와 도경」 그리고 「305호, 은진, 30년 전」 총 세 장을 읽고 해당 장의 내용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작품 전체 내용 중에서도 특히 이번 주에 읽은 세 챕터에서 시사하고 있는 내용이 최근 상영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많이 유사하다고 느꼈다. 특히 「714호, 수와 도경」 에서 수와 도경은 의사의 신분과 사하의 신분을 뛰어넘어 서로간의 애정, 사랑을 키워나가고 함께 의지하며 사하맨션에 살게 되는데, 신분에 관계없는 그들의 진정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수가 죽자 일방적으로 도경이 수의 살인범으로 몰리며 급기야 도망을 쳐야 하고 머리에 총구가 겨눠지는 도경의 처지는 그가 사하이기에 겪어야만 하는 부당하고 불평등한 운명이다. 그가 사하가 아닌 주민, 아니 적어도 L2였다면 도경이 그 자신을 변호하고 보호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그렇게 남의 집 냉장고에 숨어 있다가 몰래 도망가야만 하는 신세로 전락했을까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L2도 나은 신분이 아닌 것이 「305호, 은진, 30년 전」 이야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보육원에서 자란 L2 계급의 은진은 유년 시절 "너는 커서 보육사 해야 되겠다" 라고 말한 주임 보육사의 한 마디에 꿈을 지니게 되지만 L2가 보육사의 자격을 지닌다는 것은 수많은 난관을 넘어야 하는 일이었다. 결국 여러 심사에 의해 계약직 보육사의 자리를 따내지만 감염병이 돌자 다른 L1(타운의 진정한 주민) 계급 보육사들이 모두 출근하지 않을 때 유일하게 보육원에 출근했다가 결국 그 젊은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은진은 최근 우리 사회에 일어난 비극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성화고에 입학해 산학협력 기관에 취업해 일하다가 안전문제에 대한 고려 없이 무리하게 업무를 맡아야만 했던 ,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등진 고등학생 청춘들.

 

 누군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대학에 가고 너무도 당연하게 의식주를 누릴 때 사하맨션의 거주자들은 전기 하나, 수도하나 쓰는것도 열악한 상황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도 기택(송강호)과 동익(이선균)의 두 가정형편을 통해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기택보다도 더 낮은,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지하실에 문광(이정은) 내외가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차등을 심각히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조선시대까지 신분차별의 기준이 양반(귀족)과 상민, 노예 등 '태생적 출신'에 따라 분류되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신분차별의 기준이 경제적 문제로 변화되어 계승된 것에 다름없는 것이다. 혹자는 경제력의 경우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조남주 작가의 『사하맨션』 에서도 ,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도 경제력의 차이가 개인의 노력을 통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형성된 사회적 차별 속에서 학업(교육)의 기회, 양육의 기회, 그리고 선택의 기회 면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더욱 공고화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사하맨션』 에서 은주의 계급으로 인해 보육사라는 직업에 취직하는 일에 애초에 제한이 걸리는 일이나,  수가 타운의 주민임에도 불구하고 사하맨션에 거주하는 의사라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당하며 결국 병원에서 짤리는 일이 그러하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공고화된 경제적 차이에 따른 취업문제와 의식주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2019년을 다루고 있는 책과 영화에서 모두 빈부격차에 따른 차별, 사회적 문제를 꼬집고 있다. 이러한 사회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은주가 사하맨션에 면접을 보러간 후 은주에게 전해진 201호 왕할머니의 한 마디 대사가 깊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시험 보는 게 아니야. 너를 점수 매기겠다는 것도 아니야. 네가 뭘 할 줄 아는지 무슨 자격증이 있는지 그런 거 잘 모르겠고 중요하지도 않아. 그냥, 같이 살아도 탈은 없을까, 이미 살던 사람들이랑 잘 맞춰 갈 수 있을까 서로 인사나 하자는 거야."

 

- 조남주, 「305호, 은진, 30년 전」, 『사하맨션』, 209쪽.


 진정한 경계의 허뭄은  바로 이렇듯 우리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평가'와 '판단'을 제거해 나가는 데에 있다고 여긴다.  너는 몇 점 짜리 사람인가, 너는 몇 평에 사는가, 너는 무슨 향수를 쓰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닌 '당신은 무슨 꿈이 있나요', '당신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나요',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나요'를 물어보고 더 큰 의미를 두는 사회로 변화되기를 소망해 본다.

 다음 장에서는 메르스 이야기를 비유하는 듯 한데, 남은 서사들도 깊이 고대되며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해져 빨리 독파하고 싶다.

 

 

 

by papyros 2019. 7. 1. 23:08

[과제2] 제 7회 밑줄긋고 생각잇기

 두 번째 밑줄

조남주, 『사하맨션』, 민음사, 2019.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어느덧 조남주 작가님의 신작소설 『사하맨션』 의 ‘밑줄긋고 생각잇기’ 2주차가 되었다. 1주일 사이, 지난 6월 22일(토요일)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조남주 작가님께 직접 책에 사인을 받았고 사인본이 된 책 덕분일까, 책을 더 깊이있게, 즐겁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깊이 올라왔다.

 

지난 주차이 이어 「701호, 진경」 과 「214호, 사라」, 「201호,  만, 30년 전」까지 세 챕터를 읽으며 진경과 사라의 성장기와 가족사 등 주요 인물들의 서사에 대해 읽어내려갔다. 진경과 도경, 그리고 사라와 그녀의 어머니 연화, 30년 전 201호에 머무르며 어른이  된 ‘만’까지  사하맨션에 입주해 있는 이들은 그 누구 하나 쉽거나 편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 안에서 그들을 둘러싼 차별(구직활동에서의 차별, 의료혜택에서의 차별)과 불합리함은 그들에게 있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서사를 읽어내려가며 그저 타운 소속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L2로서, 사하로서 차별받는 삶을 당연하게 내재해 온 그 수많은 이들의 아픔에 , 그들의 고통에 깊은 연민과 아픔이 내 마음속에도 자리했다.

그래서였을까, 사라가 그 전까지 자신의 운명을 너무도 당연히 여기며 ,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짐으로 여기며 감내해왔던 것에 비해 이제는 저 너머 세상이 보이며 괜찮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불합리한 것에, 부당한 것에, 목소리를 내고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으로 변화의 가능성이 시작되는 것이기에.


 

 예전의 사라였다면 여기서 끝나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괜찮고 고맙다고 말했을 것이다. 왼쪽 눈이 없는 채로 태어났고 열두 살에 엄마가 죽었고 열일곱 살부터 술을 파는 바에서 일했다. 사라는 그 고단한 삶을 이상할 정도로 쉽게 받아들였다. 원망도 후회도 없이 심지어 때로는 감사하며 살았다. 사하맨션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라에게 세상은 딱 그 크기, 그 만큼의 빛과 질감, 그 정도의 난이도였다. 그런데 요즘 사라에게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왔던 많은 일들에 화가 나고 억울했다.

(중략)

”괜찮아?”
”난 이제 지렁이나 나방이나 선인장이나 그런 것처럼 그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미안하지만 언니, 오늘은 나 괜찮지 않아.”

- 조남주, 「214호, 사라」, 『사하맨션』, 111-112쪽. 

 그런데 이 사하맨션에서도 30년 전, 소위 ‘나비폭동’이라고 하는 - 목소리를 내고 부당함에 저항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분명 있었다. 한국 사회의 7-80년대 민주화운동과 무서울 정도로 닮아있는 나비 폭동의 과정. 30년 전 벌어진 이 시위가 타운 권력자들(총리단)에 의해 처참하게 진압되었기 때문에 지금 사하맨션에 사는 이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부당함을 자각하고 억울함을 느끼기 시작한 사라는, 사라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진경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 답답함과 한을 지니고 삶을 살아가는 수위영감은, 어떤 일을 계기로 , 어떤 방식을 통해 타운의 부당함과 불합리함, 차별에 저항할지 앞으로의 서사가 궁금해진다.

 그들의 연대는 아마 사하맨션의 주민들에서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사하맨션의 주민들 뿐 아니라 L2와 L1까지 모두, 타운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자각하는 수많은 이들의 연대와 해결 방식이 매우 기대되는 작품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지난 과오와 연대의 과정을 소설 속에서 깊이 있게 묘사하고 있어, 이 전 과정을 통해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지 매우 기대가 된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사하맨션을 통해, 우리의 과거를 통해 다시금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by papyros 2019. 6. 24. 17:34

[과제1] 제 7회 밑줄긋고 생각잇기

배송인증 + 첫번째 밑줄

 

조남주, 『사하맨션』, 민음사, 2019.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이번 제 7회 밑줄긋고 생각잇기의 테마주제는 다름 아닌,  '디스토피아 소설 ' (* 디스토피아 소설이란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나타내고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을 가리킨다.이었다.  선정된 여러 소설들 중 조남주 작가의 화제작 『82년생, 김지영』 을 이미 일전에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기도 했고, 이번에는 어떻게 사회를 묘사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메세지를 전하고 있을까 궁금해 오래 고민하지 않고 조남주 작가님의 『사하맨션』을 이번 도서로 택했다. 검은 배경에 다소 차가워보이는 회색빛 맨션이 그려져 있는 표지 디자인이 깔끔하면서도 정돈되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주까지 워낙 일이 바빴던지라  많은 분량을 읽지는 못했으나 「남매」 「사하맨션」 까지 읽으며 그 짧은 두 개의 장에서도 많은 메세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 비슷한 주제여서인지- 작년에 독서모임 멤버들과 함께 읽은 최인석 작가님의 『강철 무지개』 가 언뜻 떠오르기도 했다.

 기업이 부지를 구입해 총리를 설정하고 심지어 회장조차도 총리단에 소속된 인물을 알지 못한다는 내용을 통해 흔히 S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 자본이, 기업이 운영하고 지배하는 국가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고 7-80년대의 독재정권을 묘사하는 장면, 주민들의 계급화를 통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등 사하맨션의 초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부터 벌써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묘사하는 듯한 암시를 풍기고 있었다. 서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도 전인데 이렇듯 수많은 한국사회의 묘사가 떠오르고 있으니, 다음 장부터 본격적으로 어떤 인물들이 등장하고 어떤 서사가 펼쳐질지 기대가 크다.

 특히 역시 『82년생, 김지영』 을 쓰신,  작가답게 깔끔하고 흡입력있는 문장에... 이제 바쁜 일들이 지나갔으니 단숨에 책을 읽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책 속에 깊이 몰입하며 책 속에 담긴 작가님의 문제의식을 함께 생각하고 나누고 싶다.

 

 


 특히,  주민 자격을 얻지 못한 L2계급보다도 더욱 못한, 양육자들에 의해 포기되고 버려진 '사하'라는 계층의 거주자들이 사는 '사하맨션'에 사는 '우미' 에 대한 한 대목이 마음에 참 많이 남았고 경종을 울렸다.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스펙을 쌓아 안정적인 , 아니 사실 우리 사회의 다른 누군가보다 조금 더 잘 살기를 소망하며 아둥바둥대는 우리의 삶..

 그렇게 쌓아나가는 제도권 교육에서의 '지식'보다, 우미가 지닌 사랑과 관심을 통한 '지혜'가 더욱 의미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기에.. 제도권에 속한 것 자체가 바로 곧 그 사람의 가치를 보증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문학적 표현을 통해 되새기개 해 준 좋은 문장이었다고 여긴다. 


           노란 나비, 혹은 나방은 다시 색종이 조각처럼 팔락이며 날아가 버렸다. 사하맨션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미는 제도권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머릿속에 온갖 지식들이 가득했다. 병적으로 책을 읽었다. 역사와 철학에 특히 해박했고 유명한 소설이나 시구들도 줄줄 외웠다.

 

 

- 조남주, 「사하맨션」, 『사하맨션』, 37쪽. 


 



by papyros 2019. 6. 17. 23:59

제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5. 마지막 필사 + 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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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주에 걸쳐 읽은 김세희 작가의 단편소설집 『가만한 나날』 도 어느덧 작품집의 앞표지가 아닌 뒷표지를 보아야 할 때에 이르렀다. 지난 주까지 모든 작품을 완독한 이후 읽은  「작가의 말」과 신샛별 평론가의 작품해설 「우리의 모든 처음들」을 통해 작품해설 없이 소설을 그저 감상할때와는 다른 많은 가치와 생각을 얻을 수 있었고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낯선 작품들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책의 마지막에서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책의 마지막 장으로 가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기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2-30대 청년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김세희 작가님 또한 1987년생으로 나보다 겨우 다섯 살이 많은, 30대 초반의 작가님이시고  『가만한 나날』 이 바로 작가님의 첫 소설집이다.  

 누구에게나 찾아드는 처음.  작가님에게 첫 소설집이 있고 경진에게 삶을 돌아보게 한 첫 직장이 있고, 선화에게 애증의 대상인 첫 상사가 있는 것처럼 나 또한 비록 임용시험에 아직 합격하지 못했을지라도 내게도 첫 기간제교사로서의 삶이라는 처음이 있었다.

 심지어는 부모님도 부모로서 사는 삶이 처음 이기에 서투르다는 드라마<응답하라 1988>의 한 대목이 기억난다. 특히 나를 포함한 많은 청년세대인 20대-30대는 많은 처음을 겪는다. 처음 대학에 들어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해 나가고 직업을 선택하여 취직하고 연애하고 결혼을 하는..

 흔히 문학치료에서 이야기하는  '자녀서사-남녀서사-부부서사-부모서사'의  서사의 발달단계의 대부분이 2-30대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많은 처음을 겪어내면서 부딪히는 내적, 외적 갈등에 때로는 - 아니 어쩌면 자주 아프고 허탈하고 슬플지라도 그 첫 마음을 기억하고 담백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나가는 삶. 그런 청년들의 단면들을 이 소설집에서 담고 있었기에..격동의 서사나 갈등이 없었을 지라도

 충분히 많은 공감과 울림을 얻을 수 있었다.  작은 이야기를 통해 큰 울림을 이끌어 낸 김세희 작가의 이 소설집이 오래 기억날 듯 하다.

 김세희 작가가 「작가의 말 에서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삶을 결코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나도 지금 주어진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며 내가 지금 살아가는 삶이 옳은 방향인지를 늘 예민하게 성찰하고자 한다. 첫 직장에서 환멸을 느낀 후 자신의 삶을 위해 그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을 읽지 않는 경진처럼.

 

 



by papyros 2019. 4. 30. 12:11

제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4. 필사 4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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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작품이 마무리되는 4주차에 이르렀다. 이번 주에는 김세희 작가의 『가만한 나날』 에 수록된 단편선 中 「감정 연습」과 「말과 키스」두 단편을 일독하면서, 이 단편집의 수록 작품들을 모두 완독했다.

 이번 주에도 작품을 읽고 무언가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김세희 작가의 문체가 그렇게 무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은 각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그들이 겪는 이야기가 마치 나의, 내 주변의 흔히 볼 수 있는 2-30대 청년들의  이야기와 감정선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특히 「감정 연습을 읽으며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인턴동기임에도 불구하고, 태영과 회사에서 살아남아 취업에 성공하기 위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며 경쟁해야만 하는 회사 분위기 ,  이북 땅을 코앞에 두고 있는 회사를 다니며 그 두려움과 불안에 점차 익숙해져가는, 회사의 경쟁적인 분위기나 그런 회사에 적응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이 무언가 이질적이고 어색한..

과연 좋은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는 불안감.... 상미의 그런 내면들이  내게도 전해졌고 쉬이 공감할 수 있었다.

 

 

 

 

한편,  「말과 키스」 에서는 현진의 이야기를 통해 성적 정체감에 대한 고민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주위의 누군가도 현진과 같이, 혼자 고민하고 아파하며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누구이건, 어떤 사람을 만나건, 누구나 한 개인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이 작품을 읽고 더욱 소망한다.

 

 


by papyros 2019. 4. 24. 15:02

제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3. 필사 3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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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3주차에는 김세희 작가의 『가만한 나날』 에 수록된 단편선 中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얕은 잠」두 단편을 일독했다. 기실 두 단편 중에서도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가 더욱 마음에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아버지를 바라보는 스물 여덟 살 아들의 내면세계와 아버지와 맺고 있는 그 관계가 흥미롭고도 공감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의 약한 모습이 더 쉽게 눈에 들어오고, 부모님의 여러 부분 중 가장 미워하고 닮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일수록 더욱 닮아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에 등장하는 스물 여덟살의 주인공 '나'의 감정에 너무나 잘 이입되었다. 그와 같은 나이라서 더욱 그랬던 것일까. 분명 성인이기도 하지만, 심지어 '나'는 루미와 혼인신고를 했을 정도로 이제는 가장의 역할을 기꺼이 지고 가야 할 나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는 너무도 어린 나이임과 동시에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에 두려워지는 나이이기도 하다. 어쩌면 먼 미래에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자기가 바라지 않았던 모습으로 늙어갈 자신에 대해 두려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나 또한 깊이 공감되었다.

 나는 먼 미래에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작품은 김승옥의 소설 『서울,1964년 겨울』이나 『무진기행』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특히 『서울,1964년 겨울』의 결말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아직은 어린 것 같은데 너무도 늙어버린 것만 같은 아이러니함이란.......

 


  젊은 김씨와 안씨가 말했다.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 다섯 살 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기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 김승옥, 『서울,1964년 겨울』 中에서.

 

 

 한편, 「얕은 잠」 은 앞의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처럼 비슷한 삶의 시기를 겪고 있는 데서 우러나오는 깊은 공감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결을 따라가면서, 주인공의 내면세계에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보드를 타던 주인공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도약하던 그 장면이 마음에 와 닿았는데, 이런 도약이 미려에게 있었기에 작품의 결말부, 단지 메세지만 남기고 정운이 사라진 그 순간에서 오히려 심적인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by papyros 2019. 4. 17. 16:59

제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2. 필사 2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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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에는 김세희 작가의 『가만한 나날』 에 수록된 단편선 中 가만한 나날」「드림팀」을 일독했다. 두 작품의 결이 참 많이 닮아있다고 여겨졌는데, 두 단편 모두 스물여섯, 스물일곱 남짓한 사회초년생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순수성과 열정, 기대감을 품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으나 결국 사회생활의 단면에 실망하고야 마는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담백하고 차분한 어조의 두 단편선에 참으로 소름이 끼쳤던 이유는 두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의 삶이 내 나이또래, 20대 후반 정도의 젊은이들이 겪을 법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한 나날」 에서 고전소설 채털리 부인을 좋아하던 20대 여성 '나'는 블로그를 통해 제품을 광고하는 광고대행업체에 입사하여 능력을 인정받으며 글을 쓰지만, 자신이 리뷰한 블로그 광고 글 중 한 제품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영,유아들의 건강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되고 그녀의 일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런 회의감, 깊은 고민과 죄의식을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하는 상사로 인해 더욱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드림팀」에서 스물 일곱의 나이로 첫 직장에 입사한 '선화'는 첫 직장에서 처음 만난 팀장으로부터 부조리한 명령과 사회조직, 직장생활의 관습적인 행태에 따를 것을 요구받은 바 있다. 그녀는 이미 서른 셋이 되어 다시 첫 직장에서의 팀장을 마주했지만, 그녀의 퇴사를 좋게 보지 않으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한 , 그녀의 전 팀장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으며 바로 그 팀장으로 인해 그녀는 첫 직장생활로부터  상처와 트라우마를 얻었다.

 

 

두 단편선을 연달아 읽은 후 왜인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성적 사고와 자성, 의문 없이 그저 당위성 때문에, 그래야만 하니까 무언가에 복종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결국 크나큰 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부조리함을 , 잘못됨을 느끼고 이야기하는 젊은 청년들이 두 작품의 인물들처럼 좌절감과 허탈함, 상처를 느끼는 사회에서 벗어나 성찰과 자성 없는 잘못된 관행과 행동들이 변화되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두 작품을 읽은 후 더욱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

 

김세희 작가의 작품을 통해, 일상적인 주제와 어휘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매체가 바로 문학의 역할임을 다시금 느낀다.

 

by papyros 2019. 4. 10. 23:56

제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 과제 1. 배송 인증 + 필사 1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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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회 손끝으로 문장읽기(밀란 쿤데라)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지된 제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선정도서는 한국소설이었다. 특히 한국문학의 기성세대가 아닌, 새로이 주목되는 젊은 작가님들의 책이 이번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기실, 한국소설의 젊은 작가들은 내게 있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서양 고전을 주로 읽어왔고,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익숙한, 검증된 작가의 작품을 읽어왔던 것 같다. (헤르만 헤세, 김탁환, 엔도 슈사쿠, 에밀 아자르... 등등)

그런 의미에서 금번 7회 손끝으로 문장읽기 주제는 젊은 작가의 작품을 접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좋은 기회였고, 더불어 김세희 작가의 『가만한 나날』 근래 온라인 서점 이나 도서 카페 등에서 자주 추천되곤 하여서 망설이지 않고 김세희 작가님의 가만한 나날 을 신청했고, 금방 책이 도착해 읽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너무나도 난해한 문장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어서인지 몰라도 김세희 작가의 문체는 읽기에 평이했고 작품의 내용 또한 우리네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람 사는 삶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친숙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개별 작품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 친숙하다고 하여 그 주제의식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거야」에서는 진아 를 통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상 속, 사회인들의 모습과는 다른 가치관이나 태도를 보이는 인물에 대해 은연중 우리 내면의 평가적 잣대를 드러내는가 하면, 「현기증」에서는 원희를 통해  자신이 절대 생각도 하지 못했고 꿈꿔본 적도 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삶이 흘러가는 모습에 대한 공허함과 수용의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작중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모습이 우리 자신에게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감추고 싶은 , 숨기고 싶은 모습일 것이다.

앞으로 남은 4주 동안 김세희 작가의 가만한 나날작품집에 나오는 여러 작중 인물들을 통해 평소 깨닫지 못하던 무언가를 발견하고 찾아나가는 과정이 되기를 진실로 희망한다.

 

 

 

by papyros 2019. 4. 3. 11:54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 모든 글은 인용 , 복사 및 변형을 불허합니다.

 

- 본 게시물은 '창비'출판사 '눈가리고 책읽는당 활동'(버드 스트라이크 가제본 사전 서평단) 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출간 전 양서를 먼저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구병모 작가님과 창비출판사 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서평 중 인용문의 쪽수(페이지)는 직접 구입한 <버드 스트라이크> 정식 단행본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다친 동물을 감싸기 위해서는 양어깨의 날개를 앞으로 모두 모아야 한다. 따라서 날개가 큰 자일수록 더 큰 동물을 보살필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새의 보호를 받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새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그들은 때가 되거나 필요한 순간이 오면 모두 일정 크기의 이상은 날개를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펼쳐 보아도 비오의 날개는 그 자신의 등을 덮기에도 모자랄 만큼 짧고 작았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6쪽.

 


 

  “우리가 하는 말 …… 대강 알아듣지? 너희는 어릴 때부터 우리 말과 벽안인(碧眼人)들의 말까지 모두 배운다고 들었는데.”

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비오의 엄마의 엄마가 태어나기 전부터 도시 사람들에게 유구한 세월 들볶이고 형태가 있는 거라면 뭐든 빼앗기는 과정을 거치며 이제는 고원 지대의 고유어를 제대로 기억하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지장을 비롯해서 열 손가락 안에나 들까. 마을 행사 때 단체로 부르는 노랫말 정도를 제외하곤 자신들의 말을 쓸 일이 없었다. 고원 지대에 남은 거라곤 이제 한 뼘의 땅과 흐드러진 꽃과 바람 같은 것들뿐. 애당초 그런 것들조차 소유하려 들지 않고 고원의 품에 되돌려주면서 살아가고 싶었던 사람들은, 도시인의 약탈로 인해 그런 꿈을 꿀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20-21.

 


 

 지금은 이미 구병모 작가님의 신작으로 널리 알려진 『버드 스트라이크』의 정식 출간 전, ‘눈가리고 책읽는당활동의 일환으로 책을 수령하였다. 백색의 표지에 작품의 단서로 #새인간 #작은날개 #영어덜트소설(*Young Adult(YA)소설은 10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성장소설을 의미한다.)이라는 단 세 개의 해시태그(키워드)만 제시되어 있는 이 작품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를 지닌 채 작품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내가 읽는 작품의 작가와 책의 제목도 모른 채 책장을 처음 넘겨가는 와중 벽안인익인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다. 생소한 용어에 공간적 배경이나 시간적 배경이 특수한 SF소설인가? 미래소설인가? 하는 궁금증을 가졌던 것도 찰나, 작품을 읽어내려가며 익인과 벽안인들의 관계, 그리고 핵심 주인공 비오(익인)와 루(벽안인)가 그들의 집단에서 자리하는 특수한 위치를 읽어낼 수 있었다.

  과학기술과 문명을 지닌 도시에서 살아가는 벽안인들은 오늘날의 현대인들과 유사한 반면, 날개를 가진 사람들인 익인들은 도시의 벽안인과는 떨어져 그들만의 고원지대에서 살아가며 그들만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익인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벽안인들에게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불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심지어 벽안인들과는 달리, ‘날개를 지니고 있는특수한 인종(人種)으로 여겨져 연구나 실험의 대상으로 자리하기까지 한다.

 


  여러모로 맘에 들지 않는 생활이었지만 청사에서 지내다 보면 가끔 특별한 기회가 있었다. 청사 바에 사는 또래 아이들은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 예를 들어 오늘 같은 경우, 책에서 사진으로나 보았던 익인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고원 지대에 모여 사는 익인은 날기에 최적화된 작고 가벼운 몸집에 성질은 순한 편이라 들었는데 어쩌다 오늘처럼 떼를 지어 청사를 공격해온 건지, 지적 수준이 도시인들과 같으며 동작이 빠르고 날기까지 해서 생포가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잡혔는지 궁금했다. 낮에 그들이 천장과 벽을 두드려 대고 부수는 동안 진동을 일으키는 책상 밑에서 볼썽사납게 웅크리고 있었던 시간을 생각하면 루는 이제 가까이서 포로를 관찰하는 특전 정도는 누리고 싶은, 아직은 천진난만하고 무신경한 나이였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감수성이 익인한테까지 미치지는 못했고 그들이 무언가 진귀한 대상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35.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의 벽안인과 익인들 사이에서, 현 시행의 이복(異腹)동생이며 어머니와 떨어져 외할아버지의 고향에서 평화로이 살다가 갑작스레 어머니 아마라와 전() 시행의 재혼으로 정부청사에 들어오게 된 소외된 아이 벽안인(碧眼人) , 그리고 날개가 있는 익인들 사이에서, 익인 어머니와 벽안인 친부(親父) 사이의 혼혈로 태어나 다른 익인들보다 작고 왜소한 날개를 가지고 태어난 익인(翼人), ‘비오’.

  벽안인들의 청사에 납치되어 취조를 받던 비오가 고원으로 도망치기 위해 루를 납치한 다소 기이한 만남으로 그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결국 인종(人種)간의 경계를 넘어 루와 비오가 갖게 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자연스런 이끌림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사회(집단)에서 누구보다 약하고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타인과 동일시(同一視)한다는 것이 위험요소도 분명히 있겠으나, 비오와 루의 경우 이를 통해 외로운/소외된 이들 간의 연대와 유대로 이어졌고 그 외로움을 이해하고 품어 주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선물과 같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기실 우리 모두가 누군가로부터 평가받거나 판단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되는 관계를 맺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축복이나 선물과 같은 귀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난 걸 후회하지 않고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부끄럽지도 않아. 사실 축제 날 나 말고 다른 두 친구는 뜨거운 불 앞에서 이미 다른 이들의 청혼을 받았는데, 나한테만 아무도 청혼해 온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사람이 도시에서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어. 우리에게 귀한 것은 이름뿐이었으니까. 서로를 부르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 부르는 순간 세상에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평화의 친밀감과 흥분을 동시에 주는 이름. 단지 소리 내어 부르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체취를 상기할 수 있는, 동시에 서로의 껍질 안쪽에 자리한 영혼이 돌출되고 마는, 그런 이름 말이야.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07.

 


 

“아주 잠깐이라도, 그 인연을 귀하게 여기세요.”

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기에 루는 엉거주춤 일어서려고 했으나 지장은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어떤 우여곡절을 거쳤든 간에, 서로 전혀 다른 사람이 만나 연결된 데에는 이치가 있을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때론 설명되는 연결이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살아 있는 이유랍니다. 그러니 이어진 끈을 섣불리 자르려 하지 말고 그리로 마음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지내는 동안 루, 당신에게 평안이 있기를.”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26.


 

  작품 내에서 벽안인들과 익인들 사이의 불평등한, 차별적 관계와 루와 비오의 소외된 위치에 대한 내용과 메시지들이 유독 작품의 중요한 메시지(큰 목소리)로 들려오고 그만큼 마음에 남았던 것은 아마도 오래 전부터 2019년을 살아가는 현재까지 이러한 이슈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하며 읽어 온 우리 세대의 명작, 해리포터(Harry Potter)만 해도 마법세계에서 순수혈통과 혼혈, 머글 간의 차별이 핵심이슈로 등장하며 머글 출신이기에 차별받거나 심각한 욕설을 듣기도 하고, 집요정과 같은 존재는 생명체로서의 제대로 된 대우조차 받지 못한다. 최근 10주년을 맞이한 구병모 작가님의 등단작 위저드 베이커리(2009) 또한 말을 더듬고 집안에서 마음 줄 곳이 없는 소외되고 외로운 소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바 있다. 그만큼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다시금 차별의 실체와 소외된/외로운 이들 간의 연대와 유대, 존재의 필요에 대해 역설한 버드 스트라이크의 목소리가 반가우면서도 아직도 이러한 문제가 사회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고 동시에 고맙기까지 했다. 비단 다문화가정이나 난민문제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성별(여성/남성), 장애유무, 성적 등 다양한 방면, 어떠한 상황에서 약자이며 소수자일 수 있고 소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빠, 어떻게 좀 해 봐요. 내 작은 날개로는 이 아이를 덮을 수 없어요.

죽어 가는 다람쥐를 안고 속을 끓였던 그 때, 아버지는 뭐라고 했더라.

사막의 밤바람이 부러진 뼈마디를 속속들이 핥고 지나간 비오는 이제 상반신을 완전히 일으켜서 버티고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날개 따위 신경 끄렴.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던가?

-그냥 그대로, 꼭 안아 주면 돼.

그것이 뭐든 간에 자신이 가진 것을 주면 된다고, 아버지는 그랬던 것 같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256.

 


 

“베푸는 겁니다. 무엇이든 나눠 주는 거지요. 자기가 가진 거라면, 하다 못해 한 줌의 체온이라도 말입니다. 조각 내서 나눠 줄 수 없으니 그 순간 눈앞에 있는 당신에게 최선을 다해서 마음의 전부를 주는 것, 그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258.


 

한편 작품이 영 어덜트(Young Adult) 소설, 즉 성장소설이자 교양소설(입사식 교양소설)로서 정체성을 지니고 자리할 수 있는 성장에 대한 화두또한 중요하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익인들의 사회에서 성인이 되는 열여덟 살을 맞는 이행식은 굉장히 중요한 순간으로 다가오는데 루의 항의로 인한 지장의 내적 갈등과 변화 전까지 비오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작은 날개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열여덟살의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이행식에 참석할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였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를 통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고 예속된다면 그것을 진정한 성장이라 볼 수 있을까?

2019년 대한민국의 현대사회에서는 많은 성인들이 20-30대에 이르기까지 심리적,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심리적, 경제적 독립이 되어있지 않으니 완벽히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이르기에도 어렵다. 주요 애착대상이었던 가족, 부모에게서 온전히 독립하여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혼자 비행하기 위한 독립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며 작품은 비오의 일화를 통해 이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비오에 대한 차별에 대한 지장이 지니는 문제의식과 비오의 정체성 확립은 익인들 모두와 비오의 성장에 주요하게 자리한다.

 


 

  우리는 열여덟 살을 맞이하는 해에 날을 정해 놓고 다 같이 모여서 이행식을 한단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일. 아이에서 어른으로 건너가는 날. 그 도약을 모두가 함께 축하하는 날. 그해에 열여덟 살을 맞이하는 사람이 비록 한두 명에 불과하더라도 그 날은 마을 전체의 축제일이란다.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한 해에 한 명은 꼭 있어. 많을 때는 아홉 명까지도 있었고 나 때는 세 명이었지. (중략) 사실 내게는 별로 특별한 날이 아니었단다. 내 몸의 달맞이는 이미 한참 전에 시작했고, 그날의 축제는 나이를 한 살 다 먹는다는 의미일 뿐 사람의 인생에 어떤 경계나 구획이 명확히 그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축제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그 누구도 내가 다음에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지 않는데, 그 시간과 함께 아이의 껍질을 벗고 어른이 되었다고 선포하는 행위가 나한테는 새삼스럽게 여겨졌단다.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05-106.


“그 애는 아닙니다.”

“예?”

“비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올해 열여덟 살이 되긴 하지만 비오는 우리 안에서 온전한 어른으로 지낼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그런 비난에 가까운 폭언을 고스란히 받아 내면서도 비오의 앉은 자세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중략)

“……우리 비오라면서요.”

(중략)

“그래도 실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조금 전 제 얘기를 코로 들으셨나 봐요. 웅장하고 경직된 청사 안에서 아무도 저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숨 쉬는 것 말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갈 수 있는 데가 어딘지 알 수 없었어요. 제가 원해서 그곳으로 간 게 아닌데도요. 그런 저한테도 축복을 이야기하시고서, 이렇게 가까이 있는 비오에게는 이러실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28-130.


 

……아이가 자신의 처지를 지나치게 잘 인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규격에 맞도록 어깨를 움츠린다는 게, 좋기만 한 일이었을까? 안 그래도 작은 날개가, 비오의 마음에 영향을 받아 더 자라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더 크게 활짝 펼칠 자격이 없다 하면서.

지장은 비오에게서 어른이 될 권리를 빼앗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이 옅어지고 있었다.

“우리의 초원조는…….”

졸고 있는 줄 알았던 옛사람이 문득 입을 열어 소리를 내자 지장은 고개를 들었다.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든 간에…… 생긴 그대로 품어 주었네.”

다른 사람들의 불안과 우려를 잠재우기 위한 조치가, 생각보다 너무 길고 가혹한 대가가 되어 그 애에게 영원한 유목민 내지는 이주자의 낙인을 찍어버린 걸까. (중략)

“그러니 그 작은 날개로 어디까지 날겠는지 고민하기보다는……”

이제는 날 수 없는 몸으로 초원조의 부름을 기다리는 옛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45-147.


  비오는 그 전까지 형식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려 애썼던 이행식이라는 것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실은 자신이 이 문을 통과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었는지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얼룩의 자리를 옅은 기대감이 채워나갔다. 비오는 한 명의 당연한 익인이었다. 도대체 날개가 있는데 익인이 아니라면 뭐란 말일까?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187.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방영해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본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잊을 수 없다. 그 드라마의는 대한민국의 사교육 현실을 비판하면서 결국 자녀의 인생이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님을 핵심 메시지로 강조하고 있었다. 구병모 작가의 <버드 스트라이크> 또한 맥을 같이한다. ‘는 비오를 구하면서 자신이 지닌 힘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며 유영기 조종사의 직업을 선택하는 어른으로 성장하였고 비오는 어머니와 가족, 익인 사회의 품을 떠나 완벽한 독립을 위한 비행을 시작했다.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청소년, 청년들의 가능성을 규정하지 않고 그들이 그 가능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끔, 스스로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할 수 있게끔 하는 사회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10년간 오랜 사랑을 받은 구병모 작가의 등단작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도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 선택과 ,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바 있다.

  최신작 『버드 스트라이크』에서도 이 주제의 맥이 다른 언어와 서사로 그려진다. 루와 비오의 성장을 통해 다시금 청(소)년들에게 성장에 대한 자각을 촉구한 구병모 작가님에게 진실로 감사드리며 10주년을 축하하고 싶다. 청(소)년들의 삶에 대한 성찰과 선택하는 삶을 통한 성장에 대한 작품들을 더욱 오래 볼 수 있기를 소망해 보며 차기작을 다시금 기다린다.

 

구병모, <버드스트라이크>,작가님 사인


 

엄마와 나를 그 집에 두고 먼저 떠난 비오가 원망스럽기도 해. 하지만 그것이 비오의 선택이라면, 존중해 주려고. 비오는 결코 원해서 그와 같은 몸을 하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니니까.

출발하기 전날까지 지장 어른을 비롯해서 아는 사람들과 하나하나 오랫동안 인사를 나눴어. 그걸 보니 정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라는 걸, 일시적이며 기분 전환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완전히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꼭 그렇게 우리 옆에서 멀어지고 홀로 되어야만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를, 나아가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날아가고 싶은지…… 무엇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알 수 있는 거냐고, 마지막 날 밤까지도 나는 묻지 않았어.

아이들이란 언젠가는 부모를 떠나는 게 맞는 거라고 엄마가 허락한 걸, 내가 무슨 자격으로 따질 수 있겠어.

 

 

- 구병모, 버드 스트라이크, 창비, 2019, 339-340.


by papyros 2019. 3. 3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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